이 책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우리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세계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대장간과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대장간의 인문학적 향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드러내고자 애썼다”고 말하는 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나아가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 속을 누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장간 다섯 곳, 일본의 다네가시마 대장간 한 곳의 현장 모습을 보여준다. 인천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네 곳 등인데, 이제는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 혼자서 일한다. 젊은 누구도 대장간 일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 대장장이들이 일을 그만두면 그 대장간들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저자는 아쉬워한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마운 건 이때껏 대장간 현장을 지켜내온 이 땅의 나이 드신 대장장이 장인들이다. (…) 힘에 부칠 때마다 대장간 현장을 찾아 그분들의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고는 했다. 1938년생 최고령 대장장이가 일하는 인일철공소는 지난 연말부터 벌써 한 달 넘게 문을 닫아놓고 있다. 대장장이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다. 하루빨리 털고 일어나 대장간 문을 다시 여시기를 바랄 뿐이다.
_「책을 펴내며」에서
인천 도원동의 마지막 대장간 거리
서울의 경우 한때는 을지로 7가가 대표적인 대장간 거리였다. 녹번동이나 수색, 구파발 등지에도 대장간이 많았다. 그런 대장간들이 1970∼80년대의 급격한 산업구조 개편과 도시개발을 거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조선시대에 무기를 제조하던 각 군영(軍營)이 을지로 7가 일대에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던 야장(冶匠)들이 을지로 7가의 대장간과 철물 산업의 역사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제는 대장간이 모여 있는 곳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에 대장간 셋이 바짝 붙어 있는 곳이 있는데, 국내에 마지막 남은 대장간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도원역 부근에 있는 인일철공소, 인천철공소, 인해대장간. 이들 대장간 중에서 맏형 격은 1938년생 최고령 대장장이 송종화 장인이 운영하는 인일철공소다.
화로, 모루, 망치, 집게 등등의 필수 도구들
대장장이와 도구, 그리고 쇠. 대장간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가 있어야 쇠를 달구고 두들겨서 뭔가를 만들 수 있다. 원자재인 철물이 없어도 대장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나 원재료인 쇠 말고도 화로, 모루, 망치, 집게 같은 필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대장간 일은 쇠를 불에 달구는 작업이 우선이다. 화로에는 풀무가 따라붙는다. 바람이 없으면 화로에 불길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대장간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모루는 달구어진 쇠를 올려놓고 두들겨 모양을 잡도록 하는 도구다. 커다란 쇳덩이를 각각의 대장장이에게 맞게 세워놓았다. 형태는 둥그런 원통형이거나 네모난 전통 모루가 있고, 뾰족한 원통형 뿔이 달린 양모루가 있다.
화로에서 벌겋게 달궈진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두들겨서 모양을 잡았다면 이를 물에 넣어 담금질하는 물통이나 기름통도 있어야 한다. 또한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맨손으로 쥘 수는 없다. 집게도 수십 가지다. 만들어내는 물건의 모양이 다 제각각이어서다. 대장장이가 손쉽게 쥘 수 있도록 보통은 화로의 옆면에 걸어놓는다. “예전에 여럿이 작업하던 시절, 집게잡이는 고참이 맡았다. 풀무쟁이와 메질꾼의 윗 단계가 집게잡이였다. 집게잡이를 시작한다는 건 대장간에 들어와 5∼6년이 지났다는 얘기였다. 메질할 때 쇠를 잡아주는 집게잡이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반듯하고 빠르게 쇠를 대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메를 칠 수가 없다. 쇠가 식기 전에 빨리 대주지 않으면 쇠가 튄다. 한쪽으로만 납작해져도 안 되고, 각도 잘 나오게 잡아주어야 하니, 집게잡이의 기술력이 물건의 완성도를 좌우할 수밖에 없다.”
가짓수가 많은 망치도 집게와 마찬가지로 대장장이와 한몸처럼 놀아야 한다. 망치는 내리쳐서 모양을 잡거나 납작하게 하는 단조망치와, 쇠를 끊거나 구멍 뚫을 때 쓰는 망치형 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또 쇠메와 벼림망치로 나뉘는 단조망치뿐 아니라 구멍을 뚫거나 쇠를 자를 때 쓰는 망치처럼 생긴 정(鉦), A자형 기계 해머, 프레스기 등등 대장간의 필수 장비들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첨단 무기, 첨단 기술이라고 할 때의 ‘첨(尖)’이라는 글자는 뾰족하다는 뜻으로도, 날카롭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뾰족하면서 단단한 창, 날카로우면서 무르지 않은 칼을 만드는 부류가 대장장이이다. 그들의 일터인 대장간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금속 소재 산업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대장간은 생동하는 기술 박물관이다. 그곳에 첨단 기술 산업의 원형질이 숨쉬고 있다.”
_「책을 펴내며」에서
호미, 낫, 괭이, 쇠스랑 등의 농기구들
농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연장이다. 호미, 낫, 괭이, 쇠스랑 같은 농기구들을 만드는 곳이 대장간이다. 두루 쓰이는 호미는 종류도 여럿이고 지역마다 생김새도 다르다. 고장마다 토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갯벌에서 바지락 같은 수산물을 채취하는 일에도 호미가 있어야 한다. 요즘은 사라지다시피 한 쟁기는 사람과 짐승의 협업 도구였다. 쟁기를 사이에 두고 소가 앞장을 서고 사람이 뒤를 받친다. 쟁기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 중에 보습과 볏이 있다. 보습과 볏은 쇠로 만들어야 하는 부품이다. 보습이 땅을 밀고 들어가 위로 올려주면 볏이 그 흙을 옆으로 밀쳐놓는 역할을 한다. 보습은 주물로 공장에서 찍어내기도 했지만 쟁기질하는 농부들은 대장간 제품을 많이 썼다. 쉽게 부러지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어서다. “쟁기의 쓰임새는 보습에서 나온다. 쟁기의 형태도 여럿이었는데, 볏이 없는 쟁기는 있어도 보습 없는 쟁기는 없었다.”
괭이 역시 농사에서 아주 중요한 도구다. 밭이랑을 고르거나 골을 내거나 논을 고르거나 땅을 파는 데는 괭이가 편리한데, 지역별로 괭이의 형태가 달랐다. 경기도 부근의 괭이는 날 끝이 뾰족하고 중앙부가 약간 두터웠다. 남부지방의 괭이는 날 끝이 네모꼴이었다. 농기구 중에서 또 빼놓을 수는 없는 것이 낫인데, 무엇보다 잘 드는 낫이어야 한다. 낫에도 왼낫, 조선낫, 외낫, 왜낫, 심지낫, 을목낫, 오목낫, 황새목낫, 복합낫, 얇은낫, 당몽태낫, 수온낫 등으로 종류가 많다는 것을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대장간은 우리말의 아주 오랜 곳간
저자는 또 대장간이 우리말의 아주 오랜 곳간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우선 쇠에서 파생된 우리말이 무척 많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려면 시우쇠와 무쇠 같은 쇠붙이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쇠를 생철(生鐵), 수철(水鐵), 숙철(熟鐵) 등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생철이나 수철은 흔히 부르는 무쇠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무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하면 시우쇠가 된다. 숙철(熟鐵)이 시우쇠다. 시우쇠는 참쇠라고도, 정철(正鐵)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거느린 대장장이들과 함께 개발한 조총을 정철총통(正鐵銃筒)이라 했다. 다산 정약용은 금(金)과 철(鐵)을 구분해서 써야 한다고 했단다.
이 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에 건넨 선물 중 휴대용 불붙이는 도구인 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시를 일컬어 적었던 화금(火金)은 불을 일으키는 쇠라는 말이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는 쇳조각이 부시인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불과 쇠가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불과 쇠가 있어야만 일이 되는 대장간과 그 뜻에서 너무나 닮았던 것이다. 또 대장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성냥이다. 대장간의 다른 이름이 승냥깐이다. 충청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대장간을 승냥깐이라고 한다. “이 승냥이라는 말이 성냥에서 나왔다. 쇠를 불리는 일을 ‘성냥하다’라고도 하는데, 이 ‘성냥일’이 곧 대장일이다. 옛말에 ‘성냥노리’라는 게 있다. 대장장이가 1년 동안 깔아놓은 외상값을 받으러 섣달그믐께 집들을 돌아다니는 일을 일컫는다.” 이 책에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