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만에 새롭게 펼쳐보는
은희경 소설세계의 시작점
“이 책 안에 들어 있는 나의 질문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_‘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등단 이후 단 한순간도 과거의 이름으로 물러난 적 없이 전 세대를 아우르며 우리의 오늘을 그려온 소설가 은희경의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를 27년 만에 새롭게 펴낸다. 지난해 100쇄를 돌파한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을 비롯해 은희경의 초기작이 오랜 시간 끊임없이 읽힐 수 있는 것은 독자들의 꾸준한 관심과 더불어 작품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이 소설들을 거쳐서 나의 다음 소설이 쓰”였으며 “이 책 안에 들어 있는, 우리가 타인이라는 존재에게 말을 거는 데 서툴거나 폭력적이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개정판 작가의 말’에서)고 말했듯 등단작 「이중주」를 포함해 총 9편의 중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은 가히 은희경 소설세계의 시작점이라 할 만하다.
이번 개정판을 준비하며 작가는 그간 바뀐 시대상과 사회의식을 예민하게 반영해 작품을 전체적으로 손보고, 그 아래 있는 여전히 생생하고 날카로운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 보이는 데 집중했다. 소통이 요원해 보이는 현대사회 속 사랑과 낭만이라는 꿈에서 깨어난 여성들의 자리를 돌아보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타인에게 말 걸기』는 쓰인 지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선득하도록 유의미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던진다. 그간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는지, 지금 우리는 타인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는지. 가장 뜨거운 냉소와 가장 서늘한 농담으로 무장한 그 질문은 책을 읽는 우리 역시 스스로의 자리를 돌아보게끔 만들 것이다.
“남에게 말을 걸 때 우리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녀는 좀 이상하다.
남을 부를 때 모든 사람들이 하듯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번 개정판에서 또하나 주요하게 달라진 점은 작품 순서로,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지닌 「타인에게 말 걸기」와 「빈처」 등을 비롯해 지금의 독자들에게 좀더 긴요하게 느껴질 만한 작품을 앞에 배치하는 등 모든 작품을 새로운 순서로 배치했다.
표제작 「타인에게 말 걸기」는 “등을 보인 자에게 아예 말 걸기를 포기하는” 화자 ‘나’와 타인을 부를 때 다른 사람들이 하듯 이름을 부르는 대신 “제멋대로 제가 지어낸 별명이라든지 저만 아는 호칭”(9쪽)을 사용하는 ‘그녀’의 이야기이다. 두 인물의 소통 방식은 극적으로 다르지만, 그것이 그들을 고독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타인의 반응에는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그녀’와 그에 대한 대답으로 냉소와 침묵만을 내놓는 ‘나’, 그들의 단절과 소통의 불능은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소통의 불능은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진다. 「빈처」의 화자 ‘나’는 전업주부인 아내의 일기장을 우연히 펼쳐보았다가 스스로를 직장에 다니고 있고 애인이 있는 미혼 여성으로 표현한 일기들을 발견한다. ‘나’는 자신이 아는 아내와 딴판인 일기 속 아내의 모습에 당황하지만, 이내 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토대로 아내와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 밖에도 소설집에는 “결혼은 아무나하고 하는 거”(86쪽)라 말하던 언니의 옛 편지를 전달받고 처음으로 언니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나’의 이야기인 「연미와 유미」, 옛 사랑의 추억이 어린 절에서 머무는 동안 사랑이란 미혹에 불과하며 영원한 합일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치게 되는 ‘그녀’의 이야기인 「그녀의 세번째 남자」, 그리고 한 커플의 뻔할 만큼 보편적인 연애담을 통해 사랑이 어떻게 ‘특별하고도 위대하게’ 포장되어 사람을 현혹게 하는지를 희극적으로 묘파하는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집의 마지막에는 등단작 「이중주」가 놓여 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병문안을 간 ‘인혜’는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는 엄마 ‘정순’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지나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인혜는 어떤 부당함이든 인내하며 기나긴 결혼생활을 지탱해온 정순을 쉬이 이해하지 못하고, 정순 역시 결혼도 이혼도 쉽게 결정하는 듯한 딸 인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둘은 서로의 곁에 머무는 동안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나가기 시작한다. 남편/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모녀의 연대를 그려내는 이 작품은 희망적인 온기를 남기며 소설집의 문을 닫는다.
은희경은 과거 한 인터뷰를 통해 “어릴 적에는 세상은 이러저러하다고 반듯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반듯함이 세상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소설을 쓴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소설의 위악은 삶의 그 허상을 걷기 위한 방법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뿌리깊은 가부장제가 자리하고 있던 1990년대, 그는 『타인에게 말 걸기』를 통해 현실을 과감하게 비틀고 이를 향해 경쾌한 냉소를 던짐으로써 사회의 위선과 허상을 폭로하고 나아가 여성들에게 한 발 더 전진할 수 있는 용기를 건넸다. 2023년에 이르러 새롭게 펼쳐보는 『타인에게 말 걸기』는 우리 사회가 그간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또는 얼마큼 바뀌지 않았는지 가늠해보고, 이를 토대로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길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어느덧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소설가 백수린)이라는 말로 모든 설명이 가능해진 은희경의 소설세계, 그 눈부신 시작점이 우리 앞에 다시 한번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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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감 있는 문체와 폐부를 찌르는 에피그램들, 의뭉스러운 유머와 해학적인 풍자에 힘입어 다른 어떤 작가와도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확보한 은희경의 소설은, 가볍고 날렵하다. 유쾌하고 발랄하다. _신수정(문학평론가)
은희경 소설에서 삶을 대하는 이러한 이지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는 사랑의 허구적 성격에 대한 통찰과 한 짝을 이룬다. (…)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을 정직하게 시인하려는 자세와 아울러 타인과의 소통에 집착하는 삶의 정형(定形)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충동이 거기에서는 엿보인다. _황종연(문학평론가)
1995년, 지금보다 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를 살던 여성들에게 은희경의 소설은 그저 ‘냉소’라고만 규정할 수 없는 뜨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그의 소설은 여성으로서 한국사회를 살며 느꼈던 ‘말할 수 없는 무언가’의 언어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_최은영(소설가)
■ 책 속에서
등뒤에서 남에게 말을 걸 때 우리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름은 그래서 필요하다. 이름이라는 공용어가 없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타인 가운데 그 자신이 불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할 것이며, 더욱이 어떻게 그의 눈길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인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첫번째 단계로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상대방에게 자기의 이름을 대는 일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그녀는 좀 이상하다. 남을 부를 때 모든 사람이 하듯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하다못해 자기가 부르고자 하는 사람이 알아들을 만한 그 사람 방식의 언어로도 부르지 않고 제멋대로 제가 지어낸 별명이라든지 저만 아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타인에게 말 걸기」, 9쪽)
나는 손에 펴들고 있던 그녀의 일기장을 가만히 덮으면서 눈으로 마지막 문장을 읽는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 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빈처」, 72~73쪽)
10월 27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나는 서른 살이 되었다.
서른 살이 된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나이나 마찬가지로 서른도 외로운 나이이다. 뉴캐슬이 세상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고독한 장소인 것처럼.
가을 학기가 시작된 지 이 주일이 지났는데도 나는 뉴캐슬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오렌지 껍질을 세로로 벗기며 생각한다.
언니와 나는 다르다, 언니는 연미이고 나는 유미이다, 라고. (「연미와 유미」, 112쪽)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냐. 아마 내 생에서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난 지금의 내 인생이 싫어. 몽땅 바꾸고 싶다구. 근데 대체 뭘 바꿀 수 있겠어? 이름? 나이? 성별? 출신 학교? 지금까지 읽은 책 제목들? 같이 잔 남자들과의 과거? 내가 거쳐온 몇 가지 직업, 옷 입는 취향, 버섯과 카레를 싫어하는 식성, 다 지긋지긋해. 넌더리가 난단 말야. 이렇게 내가 싫어하는 나로 죽을 때까지 그럭저럭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끔찍하니. 그래서 낯선 사람과 결혼하려는 거야. (…) 이제 난 낯선 세계로 가서 낯선 사람으로 살아갈 거야. 행복? 그거야 알 수 없지. 어쨌든 다른 인간이 되어본다는 것으로 만족해. 지금보다 훨씬 나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거야.” (「그녀의 세번째 남자」, 119쪽)
죽은 이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에서 불꽃이 너울거리면서 사방으로 검은 재가 흩어졌다. 그리고 한가운데에서 희미한 연기가 솟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극락으로 가는 거였다. 그도 극락으로 갔을 것이다. 사랑을 맹세한 영추사가 물에 잠겨버려 지금까지 그의 넋은 구천을 떠돌았다. 이제 오래된 반지를 노자 삼아 극락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녀가 보내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천상의 약속을 천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사랑이란 천상의 약속일 뿐이다.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검은 재가 와서 앉았다. 그 밤 수문 앞에서 안개에 둘러싸일 때처럼 그녀는 무언가가 자기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아주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세번째 남자」, 192쪽)
사랑의 존위와 진실성에 대해서 유난히 신중하거나 의심 많은 사람은 아직도 그들 감정의 특별하고도 위대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상대를 그 정도로 미화하는 기술쯤은 저절로 터득하는 법이니까. 사실 연인들은 사랑이라는 최면과 자기암시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주 실험해보며 그러는 가운데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게 된다. 그 방면에 뛰어난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지나간 모든 사랑의 환부를 외과의사처럼 봉합함으로써 감정을 새것처럼 수선하여 바치는 기교까지 익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사랑에 빠졌어’라는 자기암시와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최면에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첫사랑이야’ 하는 망상의 세 가지 구색이 다 갖춰지는 셈이다.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204~205쪽)
어제 오후 차창 밖으로 보았던 나비가 생각났다. 악착같이 바람을 거슬러서 위태로운 비행을 하던 작은 나비. 그때 나는 왜 그것이 방향을 거슬러가려 한다고 생각했을까. 가고자 하는 제 방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물론 처음에 착각한 대로 나비가 아니고 먼지였다면 그냥 바람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제대로 바른 방향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바르다거나 거스른다거나 그런 방향은 다 그 나비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내가 멋대로 짐작한 것일 뿐인데도.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준열한 차이인데도. (「먼지 속의 나비」, 265쪽)
인혜가 아버지를 원망스럽게 떠올리는 것은 그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가장이 집에 없어서가 아니다. 그다음날은 날씨가 활짝 개었다. 그 갠 아침에 들어와서 아버지는 몸살로 앓아누운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집에서 하는 일이 다 그런 거라고. 그래서 인혜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역시 난생처음 뺨을 얻어맞았다. 딸을 그렇게 기특해하고 애지중지했어도 그때만은 아버지도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혜가 딸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주제넘게도 권리를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이중주」, 421~4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