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정상을 비웃으며 그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기록
정상을 정의하기도 전에 부수고 마는 문제적 이야기들
신인 민지환 작가의 단편만화집 『허무의 기록』이 출간됐다. 낯선 필명, 영화 <펄프픽션>이 떠오르는 일러스트가 장식한 『허무의 기록』에는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3부작 「현훈」 「살인자와의 인터뷰」 「최종적 형태의 가해」은 동생을 사랑하는 형의 이야기로, 동생과 형의 시점을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형이니까’ 동생을 기쁘게 만들고 싶고, ‘형으로서’ 동생을 보호하고 싶은 형의 뒤틀린 마음은 광기와 파괴로 드러난다. 무릇 형은 동생을 사랑하지만 동생은 그런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 작가는 핏줄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형제 관계의 끔찍하고 아름다운 내리사랑을 그린다.
두 번째 단편 「박제가 된 천재」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 여성 소설가의 이야기다. 선망받는 뛰어난 글솜씨를 지녔지만 그의 성별이 드러나는 순간 선망은 질투와 폄하로 변질된다. 방금까지 완벽했던 나의 글이 오직 성별에 의해 물리고 뜯기고 찢어발겨지는 것은 스스로를 좀먹는 분열로 이어진다. 자신보다도 차라리 자신의 글을 사랑해주기를 바랐던 천재 소설가, 비난 속에서도 간절히 내 나라의 내 동포들에게 읽히기를 바랐던 그의 글들. 민지환 작가는 격동과 급변의 시대였던 근현대를 배경으로 스러져간 ‘개인’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마지막 단편 「체네렌톨라」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은 여대생의 이야기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씨발~ 씨발~ 하이씨발~ 얼마나 울었을까…” 욕설 섞인 동요 <신데렐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초장부터 선을 긋는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헤어나올 수 없다고. “생리대가 없어 화장실에 가만히 앉아 있던 경험”과 “휴지가 떨어져 길에서 찌라시랑 나눠주는 티슈를 아껴 쓰던 경험”을 겪으며 살아온 주인공은 정말로 당연히 누려야 했던 것을 누리고 싶을 뿐이다. 누가 그런 그를 욕할 수 있겠는가.
문제적 작가가 그리는 사랑의 광기, 악의 평범성
불온한 욕망 아래서 끓어오르고 꿈틀거리는 이야기들
작가는 후기에서 자신의 만화를 ‘정상 타파’라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모두가 악하다는 말은 무언가를 드러내고 동시에 덮어버린다. 평범, 보통, 정상을 정의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을 무어라 정의하는 순간 그 밖의 어떤 것들은 바로 비정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것을 무엇이 묻고 정의를 따지기도 전에 ‘그런 것은 없다’고 부수어버리는 새로운 세대, 새로운 작가가 나타났다.
[수록 작품 줄거리]
「현훈」 「살인자와의 인터뷰」 「최종적 형태의 가해」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해온 주인공은 아버지가 갑작스레 실종이 되었지만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내심 수사가 종료되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들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여전히 아버지의 행방은 오리무중인 가운데, 자신과 달리 아버지에게 예쁨받으며 자라온 형이 어느 날 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기쁘진 않아?’ 수상한 형의 말, 주인공을 의심해오는 경찰. 아버지의 행방불명은 누구의 소행인가.
“나한텐 애초에 남을 공격할 수 있는 힘이 없어. 그래서 그냥 최선을 다해서 상대를 미워할 뿐인데.
만약 범인을 찾으면 저 좀 불러주실래요? 절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박제가 된 천재」
소설가 지망생 주인공은 자신의 집 담벼락에 붙은 벽보의 글솜씨에 반해 범인을 찾는다. 범인의 정체는 마찬가지로 소설가 지망생인 여성. 사랑에 빠진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소설 투고를 권유한다. 단, ‘여류작가’임이 드러나지 않는 필명을 써서. 그녀는 자신의 글은 완벽하다며 이를 거부한다. 그렇다, 그녀의 글은 완벽했다. 여성인 그녀를 물어뜯을 만큼. 시대를 앞서간 천재와 그녀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
“얌전히 화병에 꽂혀 있어야 할 꽃이 걸어나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막연하게 춤추는 무희처럼, 그녀가 눈요기로나 남아 있길 바랐을 것이다.”
「체네렌톨라」
빨간 딱지, 집 나간 아빠, 앓아누운 엄마. 가난한 주인공은 명문대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의대생이되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던 차에 시작한 술집에서 백마 탄 왕자를 만난다. 이 남자를 만나면 살면서 당연히 누려야 했던 것을 누릴 수 있다. 그의 곁에는 본처가 있지만 그녀는 이 남자만은 자신을 정말로 구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뭐 명품을 휘두르며 사치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당연히 누려야 했을 것들을 누리겠다는데.
그러면 내가 평생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살길 원해? 그게 공평하니까?”
악해지기 위해서 대단한 결심은 필요 없다. 남 눈치를 조금 덜 보고 자기 위주로 생각하다보면 그녀도, 당신도, 어느 새 악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