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 단편소설상, 펜/솔벨로상, 전미도서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퓰리처상 등 미국 유수의 상을 모두 거머쥔‘아메리카 원주민 문학 르네상스’의 주역 루이스 어드리크의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이 출간되었다. 그 자신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으로, 그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비둘기 재앙』『라운드 하우스』『사랑의 묘약』『페인티드 드럼』등을 보더라도 작품 대부분이 오지브웨족인 어머니의 계보를 찾아 다양한 군상의 모습을 담아냈던 데 반해 이번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에서는 예외적으로 독일계 미국인인 아버지의 뿌리를 추적해나간다.
1차대전 독일의 저격수였던 피델리스. 새로운 삶을 꿈꾸며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광활한 미국 노스다코타주 평원에 다다른 그는 부푼 희망을 안고 정육점을 연다. 더이상 전쟁의 참상도 없고 핏물도 땅속 깊이 젖어들었건만,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곡식값 폭락과 흉작, 대공황, 곧 덮쳐올 2차대전까지…… 절망과 위로가 뒤섞인 낯선 슬픔이 가슴속에서 거품처럼 끓어오를 때, 정육점에서는 노래가 시작된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노래가.
“도살장에서 거룩한 성당 같은 음향이 울려퍼진다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1차대전에 참전해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피델리스 발트포겔은 1918년 말, 고향인 독일 루트비히스루에로 돌아온다. 애당초 가업인 정육점 일을 이을 운명이었지만, 그의 진짜 영웅은 괴테, 하이네, 릴케 등이었다. 하지만 전쟁중 야트막한 참호에서 맹금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인간의 목숨을 간단히 꺾어버리는 일을 계속하고, 같이 참전했던 친구를 잃은 그에게 과거의 영웅들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미국산 식빵을 맛보게 되고, 세상을 떠난 친구의 약혼자 에바와 함께 안정과 새로운 삶을 위해 미국 땅으로 건너간다. 노스다코타주의 아거스 타운에 자리를 튼 둘은 발트포겔 정육점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작가가 감사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 루이스 어드리크의 할아버지 루트비히 어드리크는 1차대전 당시 최전방에서 싸웠던 독일군이었고,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2차대전 때 미국으로 참전했다. 할아버지는 독일에서 노래 길드에 속했고 미국에 건너와 정육점이자 잡화점을 경영했다고 한다.
발트포겔 정육점은 이내 아거스 타운의 명물이 되는데, 그곳에서 도살된 짐승이 타운의 별의별 군상을 먹여 살릴 뿐 아니라, 그곳의 도살실이 노래클럽의 모임 장소로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피델리스는 독일에서 정육점 주인들로만 구성된 노래클럽에 참여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이곳 미국에서는 직업을 불문하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은다. 대출 전문 은행가와 그 직원, 주류 밀매자, 타운 보안관, 가끔 얼굴을 비치는 의사, 술꾼까지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른다.
첫 모임이 있던 밤 남자들은 더없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한 분위기에 들떠 동이 틀 때까지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고 노랫말을 알려주었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커지면 두번째 후렴구부터 열정적인 합창이 되었다. 그렇게 밤새 노래를 불렀다. 익숙한 선율이 나오면 본능적으로 화음을 넣었다. 71쪽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이루어졌고 그렇게 미국 사회에 무탈하게 적응하는 듯하나, 시대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전쟁의 비극은 피델리스 대에서 그치지 않는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피델리스의 네 아들이 각각 독일군, 미국군으로 나뉘어 참전하게 된다. 피델리스의 누나인 고모 탄테를 따라 독일로 건너가 있던 쌍둥이 형제는 독일군으로, 첫째 프란츠와 둘째 마르쿠스는 미국군으로 전쟁에 투입된다. 전쟁의 맹목적인 광폭함은 아들들의 삶을 할퀴고, 그 상처는 또다시 피델리스에게 되돌아온다.
시대의 분열과 갈등을 감싸안는,
열린 가족 구조와 이를 단단하게 맺어주는 여성의 유대
발트포겔 정육점에서 도살을 하며 생계를 잇는 일은 피델리스가 도맡았지만, 일상을 챙기고 꾸리는 일은 전적으로 그의 아내 에바의 몫이다. 루이스 어드리크의 전작 『비둘기 재앙』『라운드 하우스』『사랑의 묘약』『페인티드 드럼』등이 그러하듯,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에서도 개인과 공동체의 상실과 아픔에 초점을 맞춘 서사의 핵심 줄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여자들이다. 피델리스가 매일 아침 지극정성으로 칼을 손질하는 의식을 치르는 동안 에바는 가게문을 열고 그날의 할일을 훑는다. 피델리스와 에바의 결혼은 사랑하는 이들의 결합이라기보다 전쟁 생존자 간의 연대에 가까웠다. 피델리스의 친구 요하네스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피델리스는 요하네스의 약혼자였던 에바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작이 그러했기에, 둘의 사이는 더욱 견고하다. 에바는 피델리스를 받아들였듯 주위의 소외된 자들을 따스하게 포용한다. 가게에 처음 오는 이들에겐 항상 말을 붙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들에게는 가게 깊숙한 곳에 있는 부엌으로 데려가 시나몬번과 방금 끓인 커피를 내어준다. 마을의 술주정뱅이 로이에게도, 그의 딸 델핀에게도, 가장 싼 부위의 고기만을 사가는 떠돌이 스텝앤드어해프에게도, 심지어 개에게도 따스한 눈빛을 보내며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이 에바다.
델핀은 친구 에바가 개의 눈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의 행동이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델핀은 개를 그만큼 대단하게 여긴 다른 사람은 알았던 적이 없었다. 스텝앤드어해프를 비롯해 가게를 찾아오는 부랑자나 괴짜를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고 이 짐승을 대하는 세심함에 델핀은 에바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를 더욱 사랑했다. 150쪽
에바와 델핀의 관계는 특별하다. 델핀은 우연히 정육점에 들렀다 자신의 집에 있는 시신들에 관한 비밀을 에바에게 이야기한다. 이를 계기로 둘의 사이는 가까워지고, 델핀이 조금씩 에바를 도와 가게일을 맡게 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델핀은 언제나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있었는데, 에바의 존재가 이 결핍감을 채워준다. 둘의 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나 광적인 에너지로 자신을 몰아붙이던 에바가 병을 얻어 세상을 뜨기 때문이다. 델핀은 에바의 죽음 이후 피델리스의 두번째 아내가 된다. 델핀은 에바에게 받은 사랑을 그녀의 자식들을 보살피는 데 할애하고, 그 사랑은 이어 마르쿠스의 아내가 될 매저린에게도 이어진다.
에바는 그녀에게 요령을, 지름길을, 참을성 있게 꼼꼼히 일하는 법을, 고달픈 시행착오를 통해 깨달은 온갖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평생 깨달은 지식을 알려주며 델핀을 훈련시켰고, 그녀는 에바를 사랑했기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250~251쪽
델핀의 친모는 살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델핀을 버렸다. 탯줄과 태반이 그대로 붙어 있는 상태로 버려진 델핀을 발견해 로이에게 데려다주고, 가족을 만들어준 것은 떠돌이 스텝앤드어해프였다. 그녀는 운디드니 대학살의 생존자다. 죽임을 당한 어머니의 가슴에 달라붙어 충실히 젖을 빠는 아기를, 막 걷기 시작한 아이가 총성과 함께 동강난 장면을 목도했다. 스텝앤드어해프는 그 기억을 잊기 위해 긴 다리로, 큰 보폭으로 끊임없이 걷는다.
걷기는 그녀가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않는 모든 것을 떨치고 기억보다 앞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공간에는 인간의 잔인함 따윈 없어 위안이 되었다. 570쪽
아픈 기억으로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리며 일상생활이 어려운 스탭앤드어해프였지만, 그 자신의 상처가 델핀을 본능적으로 구조하는 힘이 되었고 아이가 삶을 제대로 이어가는지 지켜볼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에바와 델핀, 스텝앤드어해프를 통해 루이스 어드리크가 그려내는 가족의 모습은, 결혼을 하여 피를 나눈 혈육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형태가 아니다. 그녀가 그려내는 가족은 편견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조건 없이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그 사랑을 되물림하는 열린 구조의 공동체다. 루이스 어드리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상실을 마주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아름다운 방법이라 강조한다.
추천사
빵을 구울 때 풍기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부엌의 냄새부터, 지하 저장고에서 인간의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까지 완강한 향들이 지배하는 이야기. 더 타임스
아메리칸드림을, 그 재앙과 승리를 그려내면서 긴 여행을 떠나는 소설. 인디펜던트
페이지마다 피와 살과 내장이 뚝뚝 유쾌하게 떨어진다. 글래스고 헤럴드
한 집안의 복잡한 가족사를 통해 정서적 공명을 일으키고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선사한다. 뉴욕 타임스
온갖 아름다움이 가득한, 마음을 일깨우는 눈부신 소설. 뉴스위크
책속에서
그는 노래와 함께라면 마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슴속엔 어두움도 무거움도 없었다. 무중력상태처럼 가볍고, 온통 음악뿐이었다. 71쪽
오묘하고 역설적인 진실은 이것이다. 한 남자의 행복한 경험이 나중에 그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
103쪽
우리는 영원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우리는 지극히 유한한 존재인데 어째서 우리에게 영원을 상상하는 저주가 내려진 걸까요? 128쪽
삶은 왜 더 솟구치면 안 되는 걸까, 델핀은 생각했다. 왜 더 좋아지면 안 되는 걸까? 168쪽
“죽은 사람들의 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세.”214쪽
애도중인 가족은 사고가 잦고 발을 헛디딜 때도 많다. 252쪽
오늘밤 어둠 속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절망과 위로가 뒤섞인 낯선 슬픔이 가슴속에서 거품처럼 끓어올랐다. 그녀는 마지막 숯덩이마저 흐릿하게 불씨가 남은 바닥에 부서져 내려앉고 슬금슬금 다가온 어둠이 모든 것을 뒤덮어버릴 때까지 상실감에 휩싸인 채 서럽게 엉엉 울었다. 264쪽
그들 중 전쟁을 떠올리지 않고 하루 혹은 몇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림 하나, 소리 하나, 단어 하나. 무엇이든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면 한 사람은 잠시 멈춰 내면의 작은 전투를 벌이다 다시 살아갈 것이다. 또 한 사람은 멀리서 터진 폭탄의 여진처럼 그 여파를 느끼겠지만 안도하거나 농담을 던지거나 맥주를 길게 들이켤 것이다. 266~267쪽
어머니가 없으니 완전히 버림받은 기분이었고, 신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304쪽
그런 삶—책을 좋아하는 삶, 독서하는 삶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이 주는 즐거움은 그녀의 고립을 풍요로운 것으로, 심지어 전복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마음속에 위로를 주는 페르소나와 공포심을 유발하는 페르소나가 번갈아 기거했다. 447쪽
그들은 춤으로 세상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망자에게 노래를 불러주면 그 소리를 듣고 망자가 모두 되살아날 거라고 생각했어. 그들은 매우 외로운 부족이었는데, 흠, 그게, 외로움은 나도 아주 잘 알지. 450쪽
전쟁이 한창인데, 제발 거기에 발을 들여놓지 마. 전쟁이 정말로 어떤 건지 청년들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504쪽
죽은 자들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가. 산 자들과 노래 한 곡 차이다. 5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