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모든 길이 끝나는 곳
그리고 거기서 가까스로 시작되는 어떤 길에 대하여
그림책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가』는 제1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권태응문학상을 수상하며 독보적인 문체와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우리 동시사에 의미 있는 매듭을 묶으며 걸어온 시인 김개미의 동시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가지만, 그 사람들이 다 바다에 가려는 건 아니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다에 도착하고 모든 길이 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어떤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희미하고 좁고 위험천만한 그 길 위에 선 존재는 전쟁과 재난, 폭력과 분쟁으로 인해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난민이다. 이 바다의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있는 이들의 모습을 이수연 화가는 새를 의인화해 표현했다. 그의 과감한 화면 연출과 붓질은 뿌옇고 황량한 외부 세계와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대비를 예술적 언어로 드러낸다.
고개 들어 정면으로 바라볼 때 존재하는
커다란 달처럼 엄연한 세계
빽빽한 안개를 뚫고 폐허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 몸에 걸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껴입고 웅크린 이들의 등 뒤로 남겨진 것은 같이 살던 개, 죽은 이웃, 노래하던 피아노, 지금까지의 삶을 이루던 전부이다. 난민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빼앗긴 채, 살던 곳으로부터 멀리 갈수록 안전할 수 있는 아이러니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김개미의 화자는 언제나 그래 왔듯이 기교나 수사에 기대지 않고,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꺼내 놓는 쪽을 택한다. 거센 파도가 들이닥쳐 부서지기 직전의 그곳이 지금 나의 일상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구체적인 상상을 통해 가늠해 보게 한다. 그릇을 닦고 꽃병에 물을 채우던 개수대, 매일 걷던 거리의 풍경들이 험한 바다의 이편과 저편을 곧장 연결한다. 냉소하거나 먼저 울지 않는 미더운 화자의 눈을 통해, 어린이 독자는 엄연한 세계로서의 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자신의 몸으로 통과해 볼 수 있다.
숨어서 부르는 노래, 틈틈이 노는 아이들과
가장 필요한 사람들 앞에 도착하는 낡고 작은 배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가』를 더욱 의미 있는 작품으로 완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압도적인 그림들이다. 이수연 화가는 그간의 작품들에서 상징적인 색채를 절묘하게 운용하여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깊은 내면을 두드려 왔다. 기약 없는 여정의 고통을 상징하는 칠흑 같은 밤하늘. 그 위로 눈부시게 떠오른 달을 향해 달려가는 장난감 버스가 설득력 있는 판타지로서 펼쳐지는 대목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화가는 살던 곳에서 내몰린 이들의 처지를 “꺾여 버린 날개로 끝이 없는 바다 위를” 날아야만 하는 텃새로 비유했다. 새를 의인화한 표현 덕분에 인간의 얼굴 표정이 아닌, 몸의 언어로 전해지는 섬세한 감정의 결이 거대한 슬픔과 찬란한 아름다움 사이를 촘촘하게 메우고 있다.
연대와 공존을 위한 상상
미래를 살아갈 우리의 아이들과 반드시 함께 나누어야 할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가』는 폭력이 납작하게 눌러 놓은 하나의 세계를 열화하지 않은 상태로 감각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미래의 세대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길러내고 지켜내야 하는 것은 몸을 바꾸는 상상력, 연대와 공존을 향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춥고 어두운 망망대해 위에서 가냘프게 울리는 노랫소리에 나의 목소리를 합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 누군가의 노래 속에서 살다, 누군가의 꿈속으로” 사라질지라도, 틀림없이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가』이다.
작가의 말
지난밤 꿈에 본 탱크의 행렬
포신이 빙글 돌아 나를 겨누는 상상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빈손을 내려다보며
_김개미
텃새는 철을 따라 자리를 옮기지 않고 한곳에서 산다.
그러나 생의 터전으로 예상하지 못한 파도가 들이친다.
꺾여 버린 날개로 끝이 없는 바다 위를 나는 새들.
그 소리가 오래, 멀리 울려 이곳까지 닿기를 바란다.
_이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