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 산 채로 묻힌 겁니까?”
『무덤의 침묵』의 도입부는 혼란스럽고 충격적이다. 이제 유치가 나기 시작한 아기가 입에서 떼지 못하고 물고 있던 장난감의 정체가 사람의 갈비뼈였다는 폭로에 이어, 그 뼈가 주택가 한복판의 공사장에서 나왔다는 신고, 그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형사 에를렌뒤르가 백골의 모습을 보고 생매장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장면까지 쉼 없이 흘러간다. 놀라움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불길한 예감에 빠진 에를렌뒤르에게 딸의 전화가 걸려 온다. “살려줘요”라는 한마디. 그리고 전화는 끊긴다. 에를렌뒤르는 밤새도록 딸을 찾아 레이캬비크를 뒤진 끝에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딸을 발견한다. 약물의존자인 딸은 임신중이었고 몇 달 전 에를렌뒤르와 싸운 후 종적을 감췄었다. 그동안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토록 강렬한 도입부는 독자를 순식간에 작품 속으로 끌어당긴다.
에를렌뒤르와 팀원들은 2차세계대전 동안 뒤죽박죽으로 쌓인 자료와 서류를 하나하나 뒤지고,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아가며 수사를 진행한다. 이렇듯 주인공 팀과 함께 단서를 하나씩 획득하고 가설과 논박을 주고받는 것이 바로 경찰소설의 재미이다. 느리지만 꾸준히 진행되는 수사를 통해 에를렌뒤르의 팀은 서서히 백골의 진실에 다가가고, 그 충격적인 진실은 작가 인드리다손의 탁월한 플롯 덕분에 몇 줄로 축약된 옛 사연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 에를렌뒤르의 마음속 또 하나의 무덤
살인이나 실종 같은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는 사건 생존자들이나 유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며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경찰 수사란 ‘범인 검거’에서 그치지 않고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작가의 신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에를렌뒤르 역시 실종 사건 생존자로서의 고통을 품고 있기에, 그의 연민과 이해는 더욱 진솔하게 다가온다.
에를렌뒤르는 어릴 적 눈폭풍 속에서 남동생과 함께 조난당했다가 본인만 구출되고 동생은 영영 잃어버린 사건을 겪었다. 이 사건은 에를렌뒤르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신원 미상의 피해자나 실종자에 집착하다시피 하는 그의 행동은 이런 개인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덤의 침묵』에서도 단서를 찾기 어려운 백골의 신원을 밝히는 일에 대해 팀원들은 물론 탐문 수사를 위해 만난 사람들까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에를렌뒤르만은 “어쨌건 거기서 뼈가 나왔고, 그것은 누군가의 뼈죠. 그냥 묻어버릴 수는 없어요. 모든 경로를 다 조사해봐야 합니다”(본문 98쪽)라며 강한 의지를 보인다.
지금껏 시리즈 속에선 에를렌뒤르의 트라우마에 대해 스치듯 지나가는 언급들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었으나, 처음으로 『무덤의 침묵』에서 자세한 내용과 함께 그의 속마음이 공개된다. 남에게 속엣말을 잘 하지 않는 에를렌뒤르란 캐릭터는 혼수상태에 빠져 대답을 할 수 없는 딸에게나 겨우 이야기를 털어놓는 정도지만, 그렇기에 더욱 솔직하고 꾸밈없는 그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상처를 처음으로 마주한 에를렌뒤르가 어떻게 그 상처를 극복하기로 했는지는 2017년 출간된 『저체온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경찰 소설의 불모지에서 태어난 거장
인드리다손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큰 언론사 《모르귄블라디드Morgunblaðið》에서 이십 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고 영화 평론가로서도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그후 스스로도 의외인 선택을 한다.
“아이슬란드 독자들이나 작가들이나 경찰소설은 질 나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어요. (중략) 자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굳게 믿어서 미디어에 범죄가 잘 다루어지지 않기도 했고요. (중략) 저조차도 제가 경찰소설을 쓴다고 생각했다면 주저했을 겁니다.” -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 인터뷰
스스로도 자기가 쓰는 것이 경찰소설이라는 자각을 못 했다고 말하는 그의 작품은 북유럽 경찰소설의 대세와는 거리가 멀다. 스웨덴의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마르틴 베크’ 시리즈(김명남 옮김, 엘릭시르 출간중)로 정립시킨 북유럽 경찰소설의 원칙을 인드리다손은 가뿐히 무시하면서도 교묘하게 따라간다.
오랫동안 북유럽 경찰소설은 실제 수사 체계를 따라 주인공 경찰이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리면서, 범죄의 배경이 된 사회문제와 비합리적인 수사 체계 및 경찰 내 비리를 폭로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뒤르 형사는 상관이든 동료의 의견이든 무시하고 수사를 진행하는 독불장군형 인물로, 경찰 시스템의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또한 그가 살면서 마주치는 가장 큰 갈등은 경찰로서의 고된 삶이나 사건 수사에서 오는 게 아니라, 어릴 적 실종된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와 가족 간의 갈등이라는 개인사에서 온다. 이런 사연이 그의 수사 활동의 동력으로 작용하기에 이 소설은 경찰소설일 수 있다.
작가가 경찰소설임을 의식하지 않고 쓴 덕분일까, 그의 대표 시리즈인 에를렌뒤르 형사의 이야기는 인간의 비극을 그린 장엄한 서사극이자 위대한 경찰소설이 되었다.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은 경찰소설의 전통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슬란드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다. 그는 아이슬란드 최고 베스트셀러 기록을 갈아치운 바 있으며, 이후 아이슬란드에서 장르 소설 작가의 위상을 바꿔놓는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 활동은 여전히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