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마술적인 위력에 도취되어
무모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마치 육식동물의 무리 한복판에 뛰어들어
우람한 뿔을 휘두르며 부연 흙먼지를 일으키는
성난 들소처럼._본문에서
내 속에는 징그러운 악귀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1995 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변태시대」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한동림이 등단 십삼 년 만에 첫 장편소설을 선보인다. 첫 소설집 『유령』으로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와 의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가슴 저릿하도록 처연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박혜경) 바 있는 작가는, 첫 장편 『달꽃과 늑대』에서 예의 그 담담함을 유지하면서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숙명적 갈등을 모티프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여가는 주인공의 내면을 선연히 그려냈다.
꽤 오랫동안 야만의 본능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면에 도사린 짐승, 그 징그러운 벌거숭이가 볼썽사납게 겅중거리는 이야기를. _‘작가의 말’에서
*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평범한 열여섯 살 소년인 ‘나’의 뒷자리에 학교 이사장의 외아들이라 선생들도 속수무책 내버려두는 깡패 홍준식이 앉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의 생활은 백팔십도 바뀌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홍준식에게 깊이 매료되면서 점점 그의 패거리에 섞여들어가지만, 어느 날 문구점에서 모형자동차를 훔쳐오라는 홍준식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밑도 끝도 없는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주먹다짐 한번 해본 적 없는 숙맥인 ‘나’는 처음 싸움을 시작하는 동안 자신 안에 또다른 자아가 도사리고 있음을 느낀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이성의 목소리는 타협에 응하라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의식의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기괴한 목소리는 정반대로 극단적인 행동을 종용하고 있었다. 내 속에는 또다른 내가 살고 있었다. 증오와 복수심과 오기가 어우러져 빚어낸 비뚤어진 영혼이었다.(17쪽)
겨 우 열여섯 살의 소년이 증오와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또하나의 영혼을 품게 된 배경에는 그의 자아 형성에 영향을 끼친 ‘아버지의 고향’이 있다. 『달꽃과 늑대』에서 특별히 한 영혼을 사로잡는 장소로서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는 곳은 고향이라는 공간이다. 고향이란 장소는 혈연관계로 엮어진 가족의 결속을 떠올리게 만들고, 그 장소에서는 이해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이나 정, 혈연적 유대감 같은 것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게 된다. 『달꽃과 늑대』에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고향에 사로잡힌 영혼을 대표하는 존재는 화자의 아버지이다.
시름시름 그믐을 앓다가도 달꽃만 따먹으면 거짓말처럼 원기를 회복한다는 괴물의 피가 어쩌면 아버지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불온한 피가 달의 운행에 따라 일렁이면 아버지는 허겁지겁 고향으로 달려내려가서 깊은 밤에 눈부신 달꽃을 욕심 사납게 혼자서만 몰래 따먹는 것이리라.(31쪽)
어 려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친척 일가들의 횡포에 한시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던 ‘나’는 어느 날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동물의 왕국에 등장하는 육식동물의 포식행위를 목격하고는, 그것이 자신의 부모를 괴롭히는 일가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그들에 맞설 수 없는 유약한 성정의 아버지, 어머니를 보며 자신의 몸 세포 하나하나에도 어쩔 수 없이 초식동물의 유전자가 옹이처럼 박혀 있음을 알고 괴로워한다. 잡아먹는 쪽과 잡아먹히는 쪽의 대비를 통해 ‘나’는 고향 사람들과 고향 자체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비로소 덮칠 듯 덤벼드는 이 모든 파도의 근원을 또렷이 목도한다.
우 덕도였다. 징그러운 눈빛과 소름 끼치는 고함이 잉태되고 태어나고 성장한 곳, 과대망상이라는 끈적한 피를 대물림해온 자들이 고향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이 바로 나를 비롯한 가족 모두를 벼랑 끝에 선 듯한 공포로 내몰던 파도의 근원이었다.(166쪽)
혼 돈과 무지의 땅 우덕도로부터 어머니의 작고 외로운 섬을 지켜주기 위해 ‘나’는 그 사나운 파도들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짐승 같은 친척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홍준식부터 쓰러뜨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처절하고도 외로운 싸움은 그렇게 시작된다.
자신 안에서 증오와 복수심과 오기로 탄생한 악귀의 부추김을 받아 한 명씩 친척들에게 복수를 감행하던 ‘나’는 우연히 아버지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고 큰 혼란에 휩싸인다. 친척들에게 늘 당하기만 하고 유약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가 사실은 젊을 적에 주먹깨나 쓰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강단을 가졌으면서도 왜 아버지는 자기 가족들에게 들이치는 파도를 줄곧 못 본 척하고 스스로 형제들의 호구가 되었던 것일까. 결국 홍준식이라는 작은 벽조차 끝끝내 넘지 못한, 유약하기 짝이 없는 ‘나’조차도 쉽게 잠재울 수 있었던 파도를 아버지는 어째서 지난 십수 년간 무책임하게 방치해온 것일까. 아버지의 이중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어느 날 서점에서 우연히 번역소설을 펼쳐들었다가 의혹의 실마리를 풀게 된다. 작은 아버지들과 고모들이 아버지에게 서슴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 수 있었던 것은, 오래전 급작스레 세상을 뜬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가의 당주가 된 아버지가 그들에게 단순히 형이나 오빠가 아니라 친부나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고립된 세계에서 거인 아틀라스처럼 양어깨로 두 가족을 떠받쳐온 아버지에게 ‘나’는 비로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고향을 갈망하나 가질 수 없는 자들의 성스런 저주
아 버지가 천착하는 우덕도라는 섬이 무지와 편견, 잔혹한 광기와 야만이 지배하는, 문명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나’는 인간의 연민과 유대에 기반을 둔 또다른 고향의 존재를 꿈꾸고 있는데, 그 장소는 다름아닌 모성이라는 이름의 공간이다.
성 인이 된 ‘나’는 아버지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우울증에 빠져 입원하게 된 어머니로부터 그간 알지 못했던 인고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로 인한 고통과 거듭되는 유산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덕도, 그 무지와 야만의 소굴에서 자신을 살려낸 것이 외가의 조부모였음을 화자에게 들려준다. ‘나’는 그리하여, 어머니에게도 실재하는 고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몇 달 뒤 어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등지자 ‘나’는 충동적으로 어머니의 고향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 장소 또한, 너주레한 추억 한 조각도 배어 있지 않은 낯선 동네였을 뿐이다. ‘나’는 이미 현대적 삶의 한가운데에서 정박할 장소를 찾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고, 고향이라는 장소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성스러운 아우라와, 그곳을 향한 신성한 갈망을 하나의 저주로 경험한 존재인 것이다. 그 성스러운 저주에 맞서기 위해, 그는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을 낳은 이, 어머니를 우울증에 이르게 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상징적 고향을 빼앗은 노파가 살고 있는 장소로 달려간다. 그러면서 다시금 추방당한 존재, 저주받은 짐승이 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
어 느새 나는 남녘의 바다를 향해 숨을 헐떡거리며 내닫고 있다. 내 몸뚱이에는 윤기가 자르르한 검은 털가죽이 씌워져 있다. 아니, 그것은 이미 내 몸뚱이의 일부다. 허리를 활처럼 휘어 앞발을 멀찌감치 뻗었다가 공처럼 몸을 웅크려 뒷발을 당기는 동작을 되풀이하며 시커먼 네발짐승 한 마리가 달빛 아래서 남쪽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
바로 그때, 지척에서 두견이가 탁한 음색으로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이 마치 저주를 푸는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짐승은 경직에서 풀려난다.(379~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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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깊고 깊은 계곡에만 뿌리를 내리는 영험한 화초였다. 스무사흘간 밤마다 달빛을 빨아들여 꽃봉오리에 응축해뒀다가 그믐칠야에 꽃망울을 터뜨려 은빛의 꽃잎을 펼쳤다. 죽기 직전이었던 반인반수의 괴물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교교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그 신비로운 꽃을 발견하고 엉금엉금 기어가서 꽃을 따먹었다. 꽃에 서린 달의 정기는 괴물의 몸속에 들어가자마자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꺼져가던 생명을 기적적으로 회복시켰다.(30쪽)
추 방당한 저주받은 존재가 하나의 신성을 획득한다…… 사람들에게 쫓겨 죽음 직전에 이른 늑대(반인반수의 괴물)가 달꽃에 서린 영험한 정기를 통해 놀라운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이 이야기는 『달꽃과 늑대』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어릴 적에 할머니에게 들은 이 민담 같은 이야기에서 독자들은 이 작품의 제목이자 고향의 은유인 ‘달꽃’과 ‘늑대’라는 식물과 동물의 이미지의 묘한 조화를 읽을 수 있다.
『달꽃과 늑대』의 서술자는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화분에 심은 씨앗이 ‘검은 땅을 뚫고 여린 빛깔의 떡잎을 밀어올렸다’고 전하며 그것은 ‘모두 제 힘만으로 해낸 찬란한 기적이었다’고 끝을 맺는다. 그 짐승이 과연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
『달 꽃과 늑대』의 서사가 증명하는 것은 현대인이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실존의 장소가 인간의 자연상태를 향한 지향에 있어 더이상 의미 있는 성취를 얻어내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성을 지니고 사유하는 존재, 자연적인 욕구를 본능의 한계들 너머로 확장하려는 열망을 지닌 존재인 인간들 속에서 고향이란 장소는 신성을 잃었고, 인간이 돌아가야 할 자연은 성스러운 저주 속에 봉인되어 있다. _허병식(문학평론가)
* 초판 발행 2008년 10월 6일 | ISBN 978-89-546-0676-9 03810
* 145* 210 | 408쪽 | 10,000원
* 책임편집: 조연주, 강건모(031-955-8865, 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