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고 웅숭깊은 시선으로 생의 아픔과 신산을 그려온 소설가 김인숙이 등단 이래 처음으로 산문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그 자신이나 문학 이야기가 아닌, 북경 이야기다. 작가는 2002년 “무조건 이민가방 두 개 싸들고 가서 도착”한 중국 대련에서 이 년을, 2006년 북경에서 다시 일 년 반을 체류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북경의 도처에 있는 옛것의 흔적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북경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작가로서의 날카로운 감수성은, 사라진 제국의 옛 모습과 그 흔적 속에 숨어 있는 오래전 이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히 역사와 기행에 대한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북경의 역사와 문화와 사람살이의 풍경이 오롯이 담겨 있는 글들은 작가의 말대로 북경에 관한 “가장 뜨겁고, 가장 재미나고, 가장 긴 이야기”이다.
북경에 처음 가본 것은 2003년 가을이었다. 중국인 친구들과의 짧은 여행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장 그때에 자금성이나 이화원에 매혹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다시 그곳에 오게 되리라는 예감을 받았고 북경의 도처에 있는 옛것의 흔적들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여행자의 예감이었다. 북경에 사는 동안에도 그 ‘여행자의 예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북경에서의 일 년 반 동안, 고궁은 열 번쯤, 이화원은 오륙십 번쯤 갔다. 이화원이 바로 집 근처였기 때문이다. 때로는 거의 매일, 때로는 일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 번쯤 긴 수로를 걸어 이화원의 남문에 도착하곤 했다. 그리고 두세 시간씩 이화원을 길게 산책했다. 북경이 내게 막연한 동경이었다면 이화원은 그야말로 가슴 설레는 연정이었다. 이화원은 늘 다른 풍경이었고, 늘 다른 이야기들로 내게 말을 건넸다. 오륙십 번을 가도 매번 새롭던, 매번 가슴 떨리던 이화원에 대한 설렘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북경에 있는 동안 많은 지인들이 여행객으로 다녀갔다. 그들 중의 누군가는 북경을 좋아했고, 그들 중의 누군가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마다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이 글은 북경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의 가장 뜨겁고, 가장 재미나고, 가장 긴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사라진 제국의 뒷길, 가장 낮게 가장 깊이 숨어 있는 이야기를 엿듣다
이야기는 1626년 5월, 북경에서 일어난 황당무계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날, 화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느닷없는 지진으로 건물들이 무너져내렸고, 이만여 명의 사람들이 숨졌다. 그때 황제는 궁궐에서 점심을 먹다가 갑작스런 흔들림에 혼비백산하여 궁 밖으로 달아났는데,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아주 가관이었다. 모든 백성들이 벌거벗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 있는 자와 살아 있는 자가 모두 함께.
이 믿을 수 없는 기록 끝에 작가는 덧붙인다. “그런데, 그때 황제도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맨몸이었을까?” 작가의 엉뚱한 질문처럼 우리가 역사 속에서 진정 알고 싶어하는 것은, 정확하게 기록된 ‘사실’이 아니다. 그 뒤에 가장 낮게, 혹은 가장 깊이 숨어 있는 ‘뒷이야기’이다. 이 뒷이야기야말로 정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또 인간적인 것이다. 정말 그때 황제도 벌거벗고 있었을까? 물음표는 점점 늘어가지만, 기록은 더이상의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이 불친절한 기록 앞에서 작가는 말한다. “상상은 여기서부터”라고. “물론 이야기도 여기서부터”라고.
사실과 상상력의 사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사실과 허구 사이의 거리와는 다르다. 과거의 거울을 통해 사람의 이야기를 찾는 것, 인간인 황제와 인간인 태후, 마찬가지로 인간인 환관과 인간인 노예…… 영광과 굴욕, 그 모든 것을 숨결로 이어붙이는 것,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한 몸의 살과 숨결이 되게 하는 것…… 상상력은 그 틈에서 존재한다.
작가의 빛나는 상상력은 자금성, 황성, 이화원, 후퉁(골목), 스차하이, 천단, 만리장성, 황릉 등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다녔던 옛 제국의 흔적들 속에서 이야기 한 편씩을 건져올렸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북경, 수없는 파괴와 수없는 건설로 많은 것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또한 많은 것들이 사라진 것의 기억을 안고 아름답게 남아 있었다. 스물네 명의 황제들과 황제보다 많은 비빈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환관들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숨어 있는 고궁에서부터 어느 이름 없는 후퉁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어딜 가든 거기 머물렀던 혹은 머무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라 자주 길을 잃었다. 작가의 말대로 “모든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이 완전히 다르게 구성해내는 이야기가 뜻밖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역사를 읽는 즐거움과 슬픔이 여기에 있다.
황제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황제가 되었고, 그리고 황제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마지막 황제 푸이,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단지 ‘사랑’ 하나를 원했지만 남김 없는 상실 끝에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마지막 황후 완룽, 황제 뒤에서 황제보다 더 높은 권력을 누렸던 천하무적의 여인 서태후, 영원한 권력을 좇아 결국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곧 나락으로 추락해버린 원세개……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가혹하며, 섬세하고 뜨거운 그들의 이야기가 김인숙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났다.
당신이 친구처럼 날 대해줬으면 해요. 나는 친구라고는 없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마지막 황제 푸이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 살 나이에 서태후의 권력욕으로 황제가 된 남자……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후에도 사라진 제국에서 ‘궁 안의 황제’로 살았던 남자…… 괴뢰정부의 황제가 되어 일본군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던 남자…… 구 년 동안 참혹한 수용소생활을 겪고 나온 후에는 사십이 년 동안의 황제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고 보통 사람이 되어야 했던 남자……
가장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이 마지막 황제는 당대에도 그랬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도 영화 등을 통해 적나라하게 벗겨진 존재였다. 하지만 작가는 그에 대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내밀한 마음속 이야기를 그려 보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궁 안을 쌩쌩 달리다가 성문 앞에 이르러 자전거를 멈추고 물끄러미 문 너머 세계를 바라보던 한 소년의 꿈과, 결혼 전 얼굴도 보지 못한 황후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이 친구처럼 날 대해줬으면 해요. 정말이에요. 나는 친구라고는 없는, 외로운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던 한 청년의 외로움과, 서구 열강의 군대에 의해 황릉들이 줄줄이 도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원수는 꼭 갚겠노라고 하늘에 맹세하던 한 남자의 분노를.
푸이는 한평생 복위와 왕조의 부활만을 염원했으나 주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용당하기만 했다. 그런 그의 일생은 너무나도 외로웠다. 특히 네 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그 누구와도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처음 맞이한 부인, 마지막 황후 완룽에게는 인간적인 정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후사를 남기기는커녕 잠자리조차 거의 같이하는 일이 없었고, 각자 시대의 고통 앞에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완룽은 아편중독자가 되어 푸이와 함께 도망가지도 못하고 일본군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행려병자로 사망했고, 푸이는 그의 평생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죽어서도 황릉에 묻히지 못했다(후에 서릉으로 이장되었다).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소년과 소녀, 그러나 적어도 자금성에서 아직 그들은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다. 푸이는 불안을 느낄 때면 완룽을 불러 밤새 자신을 지켜달라고 했고, 완룽은 한숨도 자지 않으면서 그의 잠자리를 며칠씩이나 지켜주곤 했다. 완룽은 생리 때가 되면 황제에게 달려가 “오늘 시작했어요!”라고 알렸고, 생리가 끝나면 또 달려가 “오늘 끝났어요!”라고 알렸다.
푸이와 완룽은 그렇게 불행한 채로 떠나갔지만, 그들의 흔적은 아직도 북경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은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완룽의 본가에서 한 천진했던 소녀의 숨결을 느끼며 작가는 말한다. 완룽이 되어, 혹은 푸이가, 혹은 서태후가, 혹은 원세개가 되어 찬찬히 걸어보라고. 그럼 작게 속삭이듯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 2008년 7월 4일 발행
* ISBN 978-89-546-0611-0 03810
* 152*194 | 280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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