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수묵화의 대가인 김호석 화백의 한국 암각화 연구서 『한국의 바위그림』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이미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한국 암각화의 도상과 조형성 연구」(2006)를 가다듬은 것으로, 그동안 발견된 암각화를 한국미(韓國美)의 원형과 시원을 밝히는 데 중요한 미술작품으로 대상화한 최초의 저작이다. 지금까지의 한국 암각화 연구에서는 제작자의 심미적 동기가 배제되어 있었고, 암각화를 조형미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학문적 접근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 그리고 칠포리형 암각화의 제작 방법 및 시기, 도상적 특징 등을 바탕으로 한국 암각화의 총체적 성격을 밝혀낸 이 책의 독보적 위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생활의 절실함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한국 암각화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작 시기에 따라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 ‘칠포리형 암각화’로 나누었으며 풍부한 실사와 탁본 자료를 통해 해당 암각화의 도상적 특징을 분석하고 암각화 간의 연관성을 추적한다. 저자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석기~철기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형태적 사실성, 생태적 특성을 기초로 그것을 원거리의 시각으로 포착하여 도감처럼 구성했다. 독특한 것은 수렵 동물 그림에서 주요 표현이 몸의 특징적 부위와 무늬 및 뿔에 국한되고, 이빨, 발톱 등의 세부적인 부위는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곡리 암각화 중 가장 높은 사실성을 보이는 고래 그림에서도 이러한 독자적인 미 원리와 미의식이 드러난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국보 147호)에는 육지동물과 자연현상, 식물 형상 등이 보인다. 수렵 동물 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슴인데, 사실감이 떨어지는 반면 암수를 구별하고 정황을 설정한 점에서는 대곡리 암각화보다 한층 발전된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현상과 식물 형상은 단순화와 장식 기법을 통해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기하추상형에 사실성을 상징적으로 녹여낸 자연현상 및 식물 형상은, 한국 암각화의 사실성이 전개되는 또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경주 석장동 암각화, 영천 보성리 암각화, 고령 안화리, 양전동 암각화 등의 칠포리형 암각화는 사실성과 상징성을 한꺼번에 담아낸 단순한 도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성보다 상징성에 무게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칠포리형 암각화에 나타난 일련의 도형을 일종의 부호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칠포리형 암각화의 도상은 도끼 모양을 기본형으로 하여 부족 집단의 힘과 권위를 상징화했다.
사실성은 한국 암각화 고유의 전형적 성격이다. 대곡리 암각화 육지동물 그림에서 처음 나타나는 사실성은 고래 그림에서 극대화되고, 천전리 암각화 육지동물 그림에서는 정황 묘사로 전개되다가 식물 그림에 이르러 소멸한다. 한국 암각화의 사실성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특징은, 해당 지역의 생활 여건 가운데 중요한 소재를 선택함으로써 생활을 절실함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래와 육지동물을 한데 그린 점, 수렵의 구체적 정황을 묘사하는 대신 개별 대상을 집중적으로 그린 점은 당시 삶의 방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예이다.
한국 암각화의 독자성과 보편성
동북아시아 지역 암각화와 한반도 암각화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대상의 움직임 묘사이다. 전자는 대상의 움직임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으며 구체적 정황 또한 상세하게 그려 보인다. 뿐만 아니라 태양을 마주하는 암각면의 방향, 동물의 종류, 그림 배치와 구도, 초기 제작 기법 등에서도 둘은 서로 다르다. 이는 한반도 암각화의 제작 주체가 정착 및 농경생활을 했던 반면, 동북아시아 지역 암각화의 제작 집단은 수렵 및 목축으로 경제활동을 영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한국의 암각화는 범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선 새김으로 시작해 면 새김을 거쳐 장식화, 양식화되는 제작 기법의 전개과정은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암각화의 보편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한국의 암각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도 인류 보편의 미적 정서를 따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사연댐 상류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맞먹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10만원권 새 지폐의 얼굴로 채택되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최근에는 울산에 국내 유일의 암각화전시관이 문을 열어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반구대는 1년 중 7~8개월은 물에 잠겨 있다. 1971년 반구대 암각화 발견 6년 전인 1965년 울산 지역의 식수와 공업용수 확보를 위해 사연댐이 만들어지면서 바위가 침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바위표면이 닳고 균열까지 생긴 상태다. 암각화의 보존을 위해서는 댐의 수위를 낮추어야 하는데 울산시는 식수원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며 대신 암각화 주변에 제방을 쌓고 인근 산에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돌리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또한 환경 파괴 논란과 예산 문제로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사시대 한반도의 생활상과 예술세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탁상공론과 부실행정에 의해 대책 없이 훼손되고 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