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각화된 감각과 언어로 시적 대상을 밀도 있게 그려온 이사라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가족박물관』이 출간되었다. ‘무형의 시간’과 평안한 소멸, 침묵과 죽음에 천착했던 전작 『시간이 지나간 시간』 이후 육 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여전히 ‘시간’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면서도 그 속에서 구현되는 ‘삶’이라는 실체에 한층 더 깊이 다가서고 있다.
화석화되지 않을 시간을 위하여, 삶을 위하여
서로 다른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며 혹은 끊어내며 그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곳, 박물관.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다른 시공을 살아냈던 흔적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이 공간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시간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시공간의 질서를 허물고 흩뜨린 배치로 시간의 입체성과 고유성을 박탈하는 곳이기도 하다.
16세기 시간이 14세기 시간 옆에서
기원전 3세기 시간이 일련번호 2222 시간 옆에서
이집트 조각상은 모나리자 옆에서
중국 도자기는 페르시아 유물 옆에서
분노할 줄 모르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다만 저장된 시간들이 넘쳐서
현재를 향해 역류하는데
박물관에서는 현재가 살지 못한다
마감시간에 쫓겨 문밖으로 튕겨져나오는
내가 오늘 혼잣말하고 있다
― 「그날, 박물관에서」 중에서
박물관 안에서 “현재”는, “현재를 향해 역류하는” 시간들은, 철저하게 과거로 화석화될 수밖에 없다. 각 개인의 생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 한편, 그 개별성 자체가 인류의 역사라는 큰 틀에서는 바뀌지 않는 항상적인 질서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인간은 “다시, 또, 언제나/옛날을 사는” 것이고, “당신 몸속에서 자꾸 꺼내야 하는 저 어린 후손의 후손들”(「가을이 깊어지면 당신」) 역시도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보편법칙이자 이 세상이 움직이는 지배원리인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시간의 기계적인 반복과 화석화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시간’을 찾아내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인다. “몸 바꾸기까지/스스로 삭혀가는 시간을 조용한 침묵으로 기다리는 또다른 시간”(「열정―오래된 미래9」)을 만나기 위한 시인의 시선은 이제 일상으로 향한다.
한 땀 한 땀 일상을 꿰매어가는 따뜻한 손길
오래 쓴 도시락이 창가에서 졸고
외짝 문 앞에서 흠뻑 물 먹어 탐스러운
작은 화분 몇 개가 나른하고
가끔씩 그 사람마저 조는 오후라 해도
사람 마음마저 수선하면서
이제는 버릴 것들 과감히 버리라는 조용한 충고도 듣게 될 것이다
한 평 반의 실낙원에서
혼자 된 몸으로 오랫동안 효녀였던
돋보기 쓴 사람 하나가
신의 이름을 빌려
시간을 늘리고 줄이고 꿰매고 있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함승현 옷수선집」 중에서
숟가락으로 식구를 퍼나르는 여인
숟가락으로 우주를 퍼나르는 여인
시간과 교전을 하며
달력에 숟가락을 심는 여인
(……)
천상으로 오르려다가
시간이 아직 안 되었다고
숟가락 여인
솥에 눌어붙은 그녀를 긁는다
―「숟가락 여인」 중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 다만 몇 발짝 떨어져서 구경만 할 뿐인 박물관을 몸소 일하고 삶을 꾸려가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다름아닌 사람이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따뜻한 밥 차려놓은 밥상머리에서, 동네 뒷길 옷수선집에서, 집들 사이사이 골목길에서, 아이와 함께 개미를 찾아보는 나무그늘 아래서 우리의 이웃들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아이를 기르고, 사랑을 한다. 사람들이 만든 집과 길, 시간이 흘러가는 그 골목골목에서 무수한 삶이, 진한 사랑이, 따뜻한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실로, ‘삶’이라는 바늘로, 한 땀 한 땀 꿰매어가는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보물이라는, 시인의 나지막한 속삭임은 잔잔하면서도 깊은 파문을 남긴다.
이번 시집에서 이사라가 ‘박물관’에서 ‘함승현 옷수선집’까지 삶의 공간들을 편력하며 마침내 발견해낸 것은 자신이 경험한 시간을 ‘몸’에 저장하며 몸과 삶을 하나로 운행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생기 없는 ‘박물관’으로 화하게 하거나, “사람 마음마저 수선하”는 따뜻한 일터로 만드는 것은 시간도 신(神)도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간에 대한 이사라의 오랜 탐구의 여정은 ‘인간’과 ‘사람’으로 되돌아온다. 이사라 시의 주어가 무형의 시간에서, 그 시간을 ‘삶’으로 변주하는 사람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변화들은 소박하지만 의미심장하다. _김수이(문학평론가)
* 초판발행 | 2008년 3월 10일
* 121*186 양장 | 128쪽 | 7,500원
* ISBN|978-89-546-0518-2 03810
* 담당편집|조연주, 고경화, 최유미(031-955-8865, 3572)
오래도록 꽃이 피었다가 지면
가족은 가족사진이 되고
액자 유리에 납작해진 가족은
드디어 조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