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들여다보니, 그림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림에 담아 보내는 작지만 소중한 사랑의 풍경
많은 청취자들의 밤 시간을 촉촉하게 적셔온 CBS 음악FM의 인기 프로그램 ‘꿈과 음악 사이에’의 방송작가인 지은이가 특유의 다정다감한 문체로 50가지 사랑의 기억을 50장의 ‘그림엽서’에 담았다. 마니아들이 ‘꿈음’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 프로그램의 고정 코너인 ‘마음, 머물다’와 ‘사랑의 소네트’를 채워온 것과 같은 감성이 이 책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책을 채우고 있는 것은 작지만 소중한 기억들이다. 지은이의 이름을 지어주신 고모부와 함께했던 시간들, 어릴 때 키우다가 잃어버린 강아지, 젊은 아버지와 아기 적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때 마음을 줬던 그 사람과의 대화, 빛 좋던 어느 날 빨래 널던 엄마와 함께한 한때, 친구와 수다를 떨며 보냈던 어느 오후, 서른의 자신감을 갖고 떠났던 여행, 여행지에서 보았던 잊을 수 없는 풍경… 이처럼 누구나의 마음속에 존재할, 작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기억들이 책의 페이지마다 숨겨져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독자의 마음에 남겨질 것은 ‘어느 한 장의 그림’보다 ‘어느 한 장면의 삶’이 되었으면 한다.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시계보다 먼저 아른거리고 궁금해오던 얼굴. 그렇게 무의식의 틈새까지 사랑이 배어든 아침이 있었을 것이다.
뭇 사람들의 좋았던 시절을 꺼내주고픈 마음이 상상 이상의 바람이 되어서 써낸 글이다, 기억해낸 그림들이다. _「책머리에」에서
추억 한조각, 그림 한 점
여행지에서 정성껏 엽서를 골랐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그에게 보내기 위해 시간을 들여 한 장의 엽서를 고르고, 글귀를 써내려간 기억.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좋아할 그림은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정성스레 그림엽서를 고르는 것처럼, 지은이는 소중히 간직해온 추억을 놓고 고심하여 그에 맞는 그림을 고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과거의 기억 앞으로 진심 어린 엽서를 쓴다. 지은이가 떠올린 작고 소중한 기억들, 아름다운 인연들, 길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그런 아름다운 기억들이 그림에 스며들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마음이 되어버린 그림’이자, 사랑하는 사람과 기억 속에만 남은 추억의 그, 가족과 친구에게 보내는 속 깊은 연서이다.
흔히 명화가 들어 있는 책이라면 화가에 대한 설명, 미술사적 배경 등이 설명되는 게 보통이겠지만, 『그림에 스미다』에 들어 있는 52점의 명화에는 별다른 설명이 붙어 있지 않다. 미술사적 지식보다 지은이에게 중요한,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고 건져 올린 자신의 기억, 사랑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설명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사족이기 때문이다. 지은이에게 그림은 마음이므로.
지은이는 어릴 때 어머니를 사고로 잃은 자신의 어머니를 연민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헤라르트 테르보르흐의 「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는 어머니」가 들어 있는 엽서를 골라 엄마에게 애정 어린 글귀를 적어 보내고, 맏딸을 더없이 귀애하는 아버지와의 이런저런 추억을 흐뭇하게 되새기며 장 프랑수아 밀레의 「첫 걸음마」를 골라 든다. 어느 여행길에서 벽 하나가 창으로 뚫려 온통 바다가 눈에 들어오는 방에서 머물렀던 기억을 떠올리며 너무나 적절하게도 에드워드 호퍼의 「바다와 면한 방」을 꺼낸다. 어릴 때 뛰어놀던 언덕은 윈슬로 호머의 「상쾌한 바람」과 연결된다. 이처럼 50점 이상의 아름다운 명화가 책을 수놓고 있어 보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각 장의 내용
1장 ‘그들에게 혹은 그들로부터—인연’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기억들과 그들과 나눈 시간을 담았다. 부모님과 동생, 옛 연인과 은인, 한때 키웠던 강아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고 김광석에 대한 추억이 오롯이 담겼다.
2장 ‘마음 곁으로 물들어 온 것—느낌’은 때로는 요동치고 때로는 침잠하는 감정의 변화를 담았다. 지은이는 대개 에로티시즘만을 발견하기 마련인 클림트의 그림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달뜬 사랑의 감정에서 처절한 슬픔까지, 이 책에서 그림은 온갖 감정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3장 ‘감정의 소소한 마주침—모티프’는 어떤 감정이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물건, 장소 등의 모티프로부터 출발한다. 볕 좋은 날 걸려 있는 빨래는 엄마와의 행복한 유년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촉매가 되고, 초콜릿은 지은이에게 연애의 시작, 사랑을 징표하는 미각이다.
4장 ‘떠남에서 얻은 만남—여행’에는 길에서 만난 인연과 사건을 담았다. 카리브 해의 크루즈에서 맛보았던 6성급 호텔 만찬보다 맛있었던 베트남 논두렁의 새참, 아픈 엄마를 남겨 두고 떠났던 이스탄불의 씁쓸하면서도 아름다운 기억, 거리가 음악과 춤으로 흥청거렸던 아바나의 밤거리까지, 여행에서 얻은 소중한 기억들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