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기생’이다.
기생이 되다
이내 행사 생각하니 호부호모呼父呼母 겨우 하니
산과 물 가르치고 저적저적 걸음할 때 초무初舞 검무劍舞 고이하다
명선으로 이름하여 칠팔 세에 기생되니 이르기도 이르구나
명월明月 같은 이내 얼굴 선연嬋娟하여 명선인가
명만천하名滿天下 큰 이름이 선종신善終身할 명선인가
사또에게 수청들랴 부인 행차 시종하랴
이십이 늦잖거든 십이 세에 성인成人하니
어디 당한 예절인지 짐승과 일반이라
남녀의 결혼에는 집안 지체 중요한데
순사또 가마 타고 서울로 돌아가니
운명의 정함인가 월하노인月下老人 지시런가
갑자기 부귀하면 상스럽지 않다더니 무슨 복이 이러하리
이는 모두 기생으로 세상 나온 내 자신의 잘못이라
* 初舞 :기생 춤의 하나. 춤판에서 맨 먼저 추는 춤.
* 成人 : 결혼, 여기서는 성관계
* 月下老人 : 배필을 점지해준다는 전설의 노인
시대를 잘못 만나, 부모를 잘못 만나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짐승과 일반”으로 타인에 의해 ‘성인成人’하였으나, 그녀는 본래 ‘기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자’로 태어난 ‘사람’이다.
여자로 태어나다
천지개벽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사람이 태어난 후 고금 영웅을
낱낱이 헤어보니 한둘이 아니어든
이내 몸 어이하여 남자는 마다하고 일개 여자 되어 나며
공명현달功名顯達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남자의 할 일이나
거안제미擧案齊眉하여 지아비 섬김은 여자의 떳떳한 일
* 거안제미擧案齊眉 :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여 밥상을 눈높이까지 올려서 바치는 일.
공명현달功名顯達하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못하더라도 거안제미擧案齊眉하여 한 지아비를 섬겨야 할 ‘여자’가 어찌하다보니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기생이 되었다.
일고여덟의 어린 나이에 기방에 나갔고, 겨우 열두 살에 머리를 올린 ‘여자’는 열다섯에 이미 이름을 날리지만, 손님이 몰려와 돈을 내밀어도 “푼돈냥에 허신許身할까” 거부한다.
이름을 날리다
춘광이 얼풋하여 삼오십오 다다르니,
일성一城 중 허다 호객豪客 구름처럼 모여드니,
(……)
얻자는 것 무엇이며, 보자는 것 더욱 괴怪타.
천금이 꿈속이라 푼돈냥에 허신許身할까.
기생이라 웃지 마소, 눈 속의 송백松柏일세.
그러다가 열여섯, 드디어 기다리던 님을 만나니, 관찰사인 형을 따라온 이십대 중반의 미남 재사才士이다. 그녀는 선비에게 푹 빠졌으나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관찰사가 갑자기 경질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일 년 남짓, 길지 않은 사랑이었지만 여염집 아내가 지아비를 섬기듯, 여자는 남자를 기다린다. 사시사철 님 그리며, 일 년 열두 달 님 그리며, 새 사또가 와도 절개를 굽히지 않고, 그저 기다리던 중 ‘한양동이’가 태어난다. 절개를 지키며 ‘손님’을 받지 않아 죽게 된 상황에서 ‘한양동이’는 한 가닥 희망이다. ‘한양동이’가 태어났으니 선비도 여자를 저버리지는 않으리라.
한양동이의 출생
(……)
우닌 소리 우렁차고 이마가 풍영豊盈하니
헌헌한 장부 기상 진사님을 상대한 듯
(……)
남자 아녀 여자라도 님의 기출 귀하려던
하물며 네 모양이 아버지를 닮았으니
사랑흡고 귀하기가 그 무엇에 비찬 말가
삼종의탁三從依託 좋을시고
천금같은 너를 보니 잡생각이 바이 없다
시간이 또다시 흘러 선비는 가마를 보내 ‘여자’를 정말로(!) 서울로 불러올린다. ‘집 사놓고 기별할 터이니 배신하지 말고 올라오라’ 했던 그였지만, 그 역시 기방을 드나드는 손님의 하나,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으나 곧이 믿을 수 없었던 그녀였다.
홀로 계신 어머니가 마음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해주에서 서울까지 긴 여행 끝에 여자는 드디어 선비와 상봉한다.
상봉의 기쁨
(……)
어와 벗님네야 이내 말 웃지 마소
낙양성 도리원桃李園에 꽃시절이 매양이며
폈다 지는 화류계에 오입객을 믿을쏜가
웃음 파는 우리 처지 견국부인 못 바라나 우선 상봉 즐겁도다
이 작품에는 ‘해주 감영의 명기 명선이 지었노라’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기생 명선이 첩이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절절히, 그러면서도 경쾌하게 그리고 있는 그의 회고는 첩 되기에 성공한 지점에서 끝나고 있어서 일단은 해피엔딩이다. 적어도 여기까진 그렇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생활이 어떠했을지는 함부로 짐작할 수가 없다. 여염집 출신의 첩들도 그렇지만 기생 출신의 첩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나가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생은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다. 천인이면서도 우아함을 뽐내고, 하층이지만 높은 교양 수준과 예술성을 자랑하였다.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꽃이지만,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자기 영역이 있었다.
기생을 보는 시각 역시 모순적이다. 한편에서는 저급한 창녀라고 무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수준 높은 예술인으로 선망한다. 남자들은 기생을 멸시하면서도 가까이 하고자 했고, 여성들은 얕보면서도 질투하고 경계하였다. 기생 아닌 다른 여성들에게 기생은 가정의 적이자 사랑의 라이벌이었다.
또한 기생은 조선사회의 모순을 대표한다. 욕망의 절제를 강조한 유교적 조선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번성한, 욕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조선사회에서 기생은 숫자로 보나 역할로 보나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음악, 무용, 문학 등의 문화적 기여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 월등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그들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사랑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기생에 대한 언급과 기록은 적지 않지만, 그들의 생활이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소수록』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려대학교 도서관, 미국 버클리 대학 아사미문고 및 정병설 교수 개인 소장의 기생 관련 작품을 번역, 주석, 해설한 것이다. 특히 『소수록』은 전 책을 완역하였다. 『소수록』은 본문 총 125면의 한 권짜리 한글 필사본으로, 소제목이 붙은 열네 편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는 모두 기생과 관련된 것들로, 장편가사, 토론문, 시조, 편지글 등 다양한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는 종전에는 접할 수 없었던 기생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품들로, 말하자면, 『소수록』은 일종의 기생 문학작품집인 셈이다.
열네 편의 작가는 해주 기생 명선, 종순, 청주 기생 정도로만 밝혀져 있으며, 그 편자 역시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책 끝에 “갑오 정월 이십오일 동 필사”라는 필사가 있어, 필사자가 ‘동객’이라는 사실과 필사년이 갑오년임은 알 수 있다. 동객은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는데, 대개 기생집 주위를 떠돈 남자로 볼 수 있을 듯하며, 갑오년은 작품 내용과 이 책이 도서관에 들어간 시기로 볼 때 1894년이 분명할 듯하다. 수록작품들은 대체로 19세기 중후반에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총 33쪽에 달하는 장형의 가사는 명선이 자신의 일생을 자신의 입으로 풀어낸 ‘자술가自述歌’로, 이런 형식의 기녀가사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어 기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만하다. 이외에도 『소수록』에는 한양 손님과 기생이 나누는 문답가 나 늙은 기생이 늙음을 한탄하는 ‘탄로가嘆老歌’, 해주 감영이 기생을 점고點考,일일이 세는 것할 때 불렀던 ‘점고호명기’ 등 이색적인 작품도 여럿 들어 있다.
*‘소수록’은 한글 표기로만 되어 있으나 "내용이 거의 상사相思와 관련한 것이어서 ‘소수록’이란 제목은 쓸쓸한 회포를 없애버린다는 의미(消愁錄)로 보인다"고 정병설 교수는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제 새로 찾은 기생 시문들을 통해 조선 기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기생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돈이 최고라고 한다거나 눈을 흘긴 작은 원한까지도 모두 갚아주겠다는 정도는 그 한두 예에 불과하다.
욕망과 함께 드러난 기생의 주장은 그러나 참으로 단순하다. 한마디로 하자면 ‘기생도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생의 외침은 비단 남성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여자들도 다를 바 없었다. 남성들이 기생을 해어화解語花, 곧 ‘말하는 꽃’으로 보았다면, 여성들은 이들을 ‘여우’로 지목하였다. 꽃이건 여우건 기생을 물화物化하고 타자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나는 기생이다’ ‘나도 사람이다’ 외쳤던 것이다.
* 신국판 | 392쪽 | 값 15,000원
* 초판발행 | 2007년 7월 9일
* ISBN 978-89-46-0342-3 0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