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들은, 그림이 되어 마음 속 풍경으로 남는다.
2030 일하는 여성의 일상을 그림으로 풀어내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던 『그림이 그녀에게』의 지은이 곽아람. 그녀가 이번에는 책과 그림을 엮은 에세이로 자신의 마음속 풍경을 펼쳐내 다시 한 번 독자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전작을 통해 서른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아픈 속내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위무했던 지은이가, 이번에는 책을 읽음으로써 고달픈 마음을 달래려 한다.
그녀의 책 읽기는 조금 독특하다.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다가 거기에 걸맞은 그림들을 대입해 내계(內界)의 깊숙한 곳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는” 것이 그녀의 방법. 이렇게 책 속의 인물과 문장은 하나의 이미지로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림이 그녀에게』를 통해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림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그녀의 독특한 시각은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이, 이에 걸맞은 그림을 만나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의 이야기로 저장된다. 책을 만난 그림은 지은이의 손끝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고, 그림을 만난 책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탐스러운 여백을 색채와 형상으로 채워 아름다운 파노라마로 확장된다. 이 책은, 그림을 책갈피 삼아 더 아름다운 독서를, 문학을 액자 삼아 더 풍요로운 그림 감상을 독자에게 선물하고자 한다.
지금 책을 읽는 당신,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외계(外界)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만한 강도로 압력을 가해올 때, 그 버거운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다.”
지은이에게 독서는 버거운 시간을 견디는 한 방편이자 마음속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쓰는 창작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이유로 책을 읽든,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텍스트 안에만 갇힌 독서를 해왔는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글자를 넘어 풍성한 이미지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며 자신이 소중히 간직해온 의미 있는 마음속 풍경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삶이 버겁고 힘든 날이면 고요히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쌓여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 하나씩 내면의 스크린에 비춰보곤 한다.” 이처럼 지은이에게 책이 존재의 고독과 일상의 긴장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하듯, 그림과 함께하는 이 책의 독서 방식이 독자들의 내계를 더욱 밝고 아름답게, 그리고 풍성하게 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은 그 모든 기다림의 순간에 내가 읽은 책들과, 그 책 속 이미지들이 불러낸 그림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문학과 그림이라는 두 장르의 예술을 함께 즐김으로써 삶에 자그마한 위안을 얻은 한 개인의 체험기이기도 하다. ……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림을 책갈피 삼아 조금 더 아름다운 독서를, 문학을 액자 삼아 조금 더 풍요로운 그림 감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_「글머리에」에서
그리고……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
1장 ‘여기, 당신과 나의 삶을 펼치다’에서는 한국 대표 작가들의 대표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근현대사를 관통해 오면서 온몸으로 겪어낸 혼돈과 상실의 정서와 그로 점철된 질박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림 한 점을 불러내어 독서의 경험을 풍성히 한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지은이는 봉순이의 딸로 서희의 양녀가 된 ‘양현’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유태의 「탐구」 속 여인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한다. 실험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다리를 꼰 채 정면을 조용히 응시하는 모습에서 근대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양현’을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6.25 직후 한국사회의 풍경을 그린 오정희의「중국인 거리」의 되바라진 주인공 아이를 보면서는 화가 이인성이 자신의 딸을 모델로 그린 「애향」을 떠올리고,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으면서는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했던 소녀가 좀 더 살아 자랐다면 어쩐지 미국 화가 사전트가 그린 동생의 초상화 「바이올렛」의 가녀린 소녀처럼 되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2장 ‘사랑, 아름답고 처연하다’에서는 순애보적인 사랑, 질투하는 사랑, 이타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영리한 사랑 등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도 치명적 감정인 사랑의 여러 양태를 그린 소설들을 소개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다가 결국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는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그린 「창가의 남자」에 등장하는,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멀리 창밖을 응시하는 남자가 되고, 미국 남북전쟁 시대의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성의 일생을 그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제임스 티소의 「과부」에 등장하는 상복을 입은 매혹적인 ‘과부’가 된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지은이가 주목하는 인물은 주인공인 제인 에어보다는 실체 없이 유령처럼 등장하는 ‘미치광이’ 버사 메이슨이다. 그리고 그녀는 제임스 휘슬러의 「흰색의 심포니 No.1―흰 옷의 소녀」의 형상을 하고 독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과연, 하얀 옷을 입고 넋 나간 듯 서 있는 모습이 “제인의 묘사와는 달리 애잔하고 여린 내면을 지닌 비운의 여인일 것 같은” 버사 메이슨을 연상케 한다.
3장 ‘인간, 더 인간다움을 고뇌하다’에서는 인간이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번민과 삶에 대한 끝없는 탐구,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치열한 자기검증을 통해 드러낸다.
지은이는 벨기에 화가 페르낭 크노프가 자신이 무척이나 사랑했던 여동생의 얼굴과 자기 얼굴을 합성해 만들어낸 「침묵」의 얼굴,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뒤섞인 얼굴, 천사의 것도, 악마의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기이한 얼굴”이 헤르만 헤세가 창조해낸 인물 데미안의 현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달로 ‘변신’한 사내를 담고 있는 그림 「생존의 기술」을 보면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를 떠올리고, 루쉰의 「고향」을 읽으면서 장욱진의 「자화상」을 다시 생각해본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는 루쉰의 ‘희망’에 대한 정의를 읽고 감명을 받은 지은이가, 바로 이 글귀에 어울리는 그림으로 장욱진의 「자화상」을 떠올려낸 것이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콧수염을 기르고, 짙은 눈썹을 한 루쉰이 고뇌하는 표정으로 근대화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을 떼어 가는데 그가 밟은 땅 위로는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운, 흙냄새 물씬 나는 갈색의 길이 나 있는 장면”이 바로 「자화상」에서 장욱진이 그린 풍경과 같기 때문이다. 서로 관련 없이 외따로 존재했던 루쉰과 장욱진은 이렇게 지은이의 책-그림 읽기를 통해 만난다. “소위 ‘현실참여적’인 예술가였던 루쉰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던 것으로 평가받았던 예술가 장욱진이 그려낸 희망이 결국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4장 ‘소녀, 책을 추억하다’에서는 동화 또는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가득한 책들, 그리고 지은이가 어린 시절에 읽은 책들을 통해 유년시절 독서에 대한 추억을 더듬으면서 어른이 된 이후 다시 읽은 이 책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다가올 수 있는가, 또 어른이 되고 나서 이 책들이 어린 시절과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를 환기시켜준다.
미국의 대중화가 노먼 록웰이 그린 「눈에 멍이 든 소녀」는 지은이가 곧장 떠올린 대로 영락없이 『빨강머리 앤』의 앤, 길버트에게 ‘홍당무’라고 놀림 받고 화가 나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친 다음 체벌을 받고 있는 앤 셜리의 모습 그대로다. 마르크 샤갈이 그린 「달로 가는 화가」는 화가가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그림 없는 그림책』을 읽고 영감을 얻어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면서 떠올리는 그림은 다소 의외다. 네덜란드의 장르화가 테르보르흐의 「편지를 든 채 술을 마시는 여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연결점을 따라가 보니, 어린 왕자가 별들을 여행하면서 만났던 술꾼이 모습을 드러낸다. ‘창피해서’ 술을 마셨던 술꾼과 “사랑을 잃고 슬퍼하는 자신이 창피해서 마시고, 사랑을 잃고 술에 취한 자신이 창피해서 마시고, 내일이면 더 슬퍼질 자신이 창피해서 또 마시고” 하는 그림 속 여인, 혹은 지은이 자신의 모습을 일치시킨 것이다. 지은이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즐겨 읽어주고 외우게 했던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맞는 그림을 찾는다면? 당연히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별을 사랑했던 시인과 별을 사랑했던 화가, 그리고 그들의 짧은 생애가 마음을 울리고 적시는 독서와 그림 감상으로 독자들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