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인스턴트의 시대라지만,
여자에게 비닐봉지처럼 가벼운 안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에게도 비즈니스는 있다.
일생을 건 베팅도 필요하다.
“너는, 아직도, 진정한 사랑을, 믿는구나?”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들을 노련하게 짚어내는 작가 노희준의 두번째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2005년부터 최근까지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 지금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현실의 병폐들에 주목한다. 이전부터 보여왔던 작가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빛을 발하면서도 그 발걸음은 전작들보다 더 가볍고 경쾌해졌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남자가 있다. 일단은 동물(Animal)과 짐승(Beast)과 괴물(Ogre)로 나뉜다. 짐승도 동물 아니냐고? 날카로운 질문이지만 미묘한 어감의 차이에 주목하라. A형은 원래 온순하거나 길들여진 부류다. 농가의 가축이나 동물원 식구들이 그들. B형은 야생의 동물이다. 언제든지 사람들을 들이받거나 할퀼 수 있다. B형의 야만성은 훈련을 통해 제거할 수 있지만 O형이라면 포기하라. 그들은 사랑하는 여자도 물어뜯는 드라큘라와 같다. 섞이지 않는 순수혈통, 나쁜 피. 변종으로 동물과 짐승을 오가는 혼합형(ABnormal)이 있다. 차로 말하면 컨버터블인데 평소에는 안락하지만 일단 뚜껑이 열리면 모질게 바람 맞거나 폭우를 만날 수 있으니 유의할 것. _「X형 남자친구」 중에서
혈액형으로 남자의 종류를 구분하고, 그를 통해 가장 마음에 드는 짝을 찾아 이십대 솔로 탈출을 이루려 하는 스물여덟 살의 여자가 있다. 혈액형에 관한 책들은 모조리 섭렵했고, 이제는 그에 관한 것이라면 새로 나온 책이 있다 해도 자신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런데, 이놈의 남자들,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세상에는 마흔 가지 종류의 남자가 있다. 왜 이랬다저랬다 하느냐고? 그럼 동일한 혈액형이면 성격도 무조건 같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존경하는 혈액형학자 노미 마사히코는 모든 분류에는 조건이 있게 마련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격을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조건이 뭐겠어. 보나 마나 부모지. 그러니까 아빠, 엄마가 어떤 형이냐에 따라서 A형과 B형은 열둘, O형은 아홉, AB형은 일곱 가지로 세분되는 것이다.
(……)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 배재벌을 통해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세상에는 일백예순 종류의 혈액형이 있다는 것을. 나의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 마사히코도 혀의 두께까지 고려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_「X형 남자친구」 중에서
여자가 오랫동안 갈고닦은 혈액형별 연애기술은 과연 실전에서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삶, 그 거대한 게임판의 진정한 플레이어가 선사하는
고통과 쾌감, 상처와 치유의 한판 승부!
이 외에도 작가는 가정폭력, 스토킹, 몰래카메라, 강남 팔학군 등 우리가 항상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딘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문제적 현상들을 코믹한 인물과 상황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한 척 풀어놓는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는 듯, 아무리 심각한 문제도 특유의 블랙유머로 천연덕스럽게 눙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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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일요일 열한시경, 애인의 오피스텔 침대에서 잠을 깬 그는 숙취로 쓰린 배를 버릇처럼 쓰다듬었다. 그런데, 손이 몸에 얹히지 않고 뱃속으로 쓰윽 들어가버린다. 감염자와의 성관계를 맺으면 백 퍼센트 전염되는 ‘후천성 존재결핍증’, 발병하면 몸이 몸을 통과하는 일명 ‘통과병’은 전 세계에 무서운 속도로 번져,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감염자들은 시설에 격리 수용된다. 하지만 ‘타인의 살아 있는 살’에 굶주린 감염자들은 결국 폭동을 일으키고, 거리로 쏟아져나와 닥치는 대로 정상인들을 덮친다. 세 달 만에 국민의 절반이 강간당하고 감염자들의 세상이 도래하자, 선택받지 못한 정상인들은 지하로 숨어든다.
「다람쥐 죽이기」 나, 달건은 사장님 돈을 떼먹고 달아난 껌치를 잡기 위해 지방의 작은 마을로 간다. 술집, 티켓다방 등을 뒤져 찾아낸 껌치의 단골 여자애에게서 은신처에 대한 자백을 받아낸 나는, 평야를 지나고 산을 올라 드디어 허름한 판잣집을 발견한다. 그런데 집 안에서 요란한 발소리, 비명소리,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난다. 마누라를 샌드백처럼 다루는 껌치. 상도에 어긋나긴 하지만, 어차피 잡아갈 거 착한 일 한번 하자는 생각으로 나는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그런데, 그 안에서는 껌치가 누운 채 피를 흘리며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 본의 아니게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 나. 그리고 구석에서 껌치의 마누라가 칼을 쥔 채 서서히 일어난다. 어둠 속에서, 여자는 배시시 웃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의 역사」 엄마가 아빠를 찔렀다. 벌써 다섯번째다. 안방 바닥에는 붉게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엄마의 청순함에 뻑 가서 자살소동을 벌여 결혼에 성공한 아빠는, 다른 남자를 만날까봐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한 채 매일같이 엄마를 두들겼다. 그래서 엄마는 술을 배웠다. 술을 먹자 엄마는 아빠가 되었고, 아빠가 된 엄마 앞에서 아빠는 어린애가 되었다. 맞다 지치면 엉엉 우는가 하면 마지막 필살기로 귀여운 척까지 했다. 오늘도 내가 집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막 식탁에서 일어나는 참이었다. 한 손에는 소주병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나비처럼 안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 사회학과 강사인 S는 어느 봄날, 스토커에 대한 자신의 사회학적 관점을 듣고 싶다는 여학생에게 술을 사준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그 여학생을 삼 년간 쫓아다녔다는 스토커 남자애에게서 욕설과 협박으로 도배된 문자메시지가 시시때때로 날아온다. 그리고 자신이 집에 도착하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검은색 코란도. 매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 가만히 있다가 가는 남자애는, S를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몸에 대고 쏘면 죽을 수도 있는 리볼버 가스총을 구한 S는, 매일 자신의 차를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두고 렌터카 안에서 코란도의 동태를 살핀다. 녀석이 먼저 움직여 내 집 안으로 들어서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정당방위를 증명할 방법이 없으므로.
「외눈박이」 나는 내가 사는 십층짜리 건물의 복도에 몰래카메라를 심고 사람들의 생활을 훔쳐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카메라에 찍혀 있는 옆방 여자는 벌써 칠 주째 쓰레기를 내놓지 않고 있다. 일주일 전 식료품 등속을 사서 들어간 것을 마지막으로, 외출은커녕 문 한번 열지 않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몰래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보다 중간에 삭제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곧 쓰레기장을 뒤져 잘게 두드려 부순 비디오테이프의 파편들과 함께 옆방 여자의 하얀 양말 한 켤레가 든 쓰레기봉투를 발견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자신의 행적을 들키지 않는 게 목적이었다면, 여자는 왜 식료품 사오는 장면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것일까?
「하찮군, 날다」 나, 하찮군은 귀찮은 고민거리들에 포위당해 있다. 자고 있는데 전화를 걸어와 이 주 전에 헤어진 내 애인을 옛날부터 좋아했다며 ‘좀’ 사귀어도 되겠냐고 묻는 친구 ‘귀찮군’에, 새 팀장이 온 날로부터 태풍주의보와 태풍경보 사이를 오가는 사무실 분위기에, 개인적으로 사무실을 차린 뒤 내 책상을 비워뒀다며 매일같이 전화하는 선배까지…… 그런 와중에, ‘귀찮군’은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동창 주나가 포주로 재벌 된 놈과 결혼한다는 사실에 발끈하고, 팀에서 왕따당하던 팀장은 몇몇 과장들과 부사장의 비리를 밝혀 목을 날리고 영업부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X형 남자친구」 세상에는 네 종류의 남자가 있다. 동물(Animal), 짐승(Beast), 괴물(Ogre), 그리고 동물과 짐승을 오가는 혼합형(ABnormal). 내 꿈은 이십대 솔로 탈출.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에 확실하게 엮이고, 내년 상반기쯤 청혼을 받아야 가까스로 경쟁력 없는 삼십대를 면할 수 있다. 다행히 최근 품질 괜찮은 물고기 두 마리가 입질을 보내고 있다. 한 명은 O형의 예술가 지망생 오군. 또 한 명은 B형의 젊은 사업가 배군. 선택이 쉽지 않아 고민중인 마당에 잡어가 한 마리 출현한다. 같은 사무실의 이호구 대리. 앞뒤 꽉꽉 막힌 A형 남자의 전형인 그는 실없는 문자메시지를 줄줄이비엔나로 보내는데……
「물실로폰」 전에 있던 초등학교의 합창단에서 솔로를 했던 나는, 오빠의 교육을 위해 전학 온 강남 팔학군의 학교 합창단에서 솔로 후보의 초강력 스펙에 기가 죽는다.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부르면서도 단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웃는 고은이와 천의 목소리를 가진 수진이. 하지만 내가 솔로를 할 수 없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합창단에 오래 있었던 애가 솔로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강북에서 왔고 세 식구가 원룸에서 살고 엄마가 밤일을 하는 나와 달리, 고은이네 차는 에쿠스라는 것을. 나는 싫어하는 레몬맛 츄파춥스를 들고 엄마가 BMW를 모는 지체부자유아 용범이에게 다가간다. 솔로 할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내 말에, 용범이는 선생님에게 이야기해 독창대회를 성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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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준의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는 보다 참신한 상상력과 문학적 시각을 활용하여 새로운 세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_김종회(문학평론가)
『X형 남자친구』의 수록작들에서 작가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진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또한 논리 구성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졌을 뿐 아니라 작중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에 걸맞게 문장 역시 산뜻하고 가볍다. 이론적 관념성 대신 속어와 욕설이 가득한 구어체를 통해 가벼운 멜랑콜리를 담아낸다. _양윤의(문학평론가)
* 초판발행 | 2009년 8월 20일
* 145*210 | 264쪽 | 값 10,000원
* ISBN 978-89-546-0874-9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서현아 (031-955-8865, 8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