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떼』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등 다수의 시집을 통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치열한 자기반성, 곧지만 넉넉한 시심(詩心)으로 독자들을 만나왔던 정양 시인이 신작 시집 『철들 무렵』을 선보인다. 24절기와 세시풍속을 소재로 한 시편들을 중심으로 묶어낸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은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의 삶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대동(大同)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세월과 사이좋게 동거하면서 관대해지거나 불화하며 초조해지는 사람들의 일이 이 세상에 명절이니 이십사절기니 기타 여러 속절(俗節) 같은 마디를 만들었을 테고 농경문화가 주눅들어버린 요즈음에 그것들을 깜박깜박 잊어먹긴 해도 그게 다 우리네 삶의 끈이었거니 싶어 그 마디들을 새삼 추슬러보았다. 그렇게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우리네 초조한 세월을 조금이나마 놓아주었으면 좋겠다. _‘自序’에서
세월이 가져다준 성찰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삶의 정겨운 풍경
총 2부로 구성된 시집의 1부 40편의 시는 모두 소재와 제목을 24절기와 세시풍속에서 따왔다. 이 시편들은 입춘, 우수, 경칩에서부터 입동, 소설, 대한에 이르기까지, 일 년 열두 달 사계절을 아우르는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 속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변화와 우리네 삶의 정겨운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얼다 녹은 냇물에
살얼음 낀다 살얼음 밟듯
목숨 걸고 봄이 오는지
궁금한 수심(水深)을 길어올리는
피라미 한 마리
하얀 뱃바닥으로 살얼음을 만져보고
갸웃거리며 다시 가라앉는다.
―「입춘立春」 전문
겨우내 얼어붙었던 만물이 동면에서 깨어나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은 “피라미 한 마리”의 움직임으로 형상화된다. “얼다 녹은 냇물”에 낀 얇은 살얼음의 감촉을 “하얀 뱃바닥”으로 느끼고는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 피라미의 모습에서 이제 곧 완연해질 봄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다.
이후 경칩, 삼짇날, 청명, 곡우를 지나 입하, 소만, 망종으로 이어지는 여름철에 이르면 곡식과 풀나무 들의 성장기가 펼쳐진다.
오뉴월 하룻볕이면 풀나무가 석 짐이라고 잊어먹을 만하면 그 하룻볕을 일삼아 내세우던 동갑내기 후배, 생일이 나보다 보름이나 빨랐다 풀나무를 석 짐은 베어 말린다는 당당하던 그 하룻볕도 하릴없이 기가 꺾이는 저녁나절, 하지감자는 아무 때나 캐먹어도 갈 데 없는 하지감자라며 하지 되기 전부터 동갑내기랑 함께 도둑감자 캐먹던 비탈밭, 이제는 하지감자 대신 망초꽃 뒤덮인 묵정밭머리에 한세상 함부로 거덜내고 돌아온 저녁놀이 수십 년 묵은 하룻볕을 한꺼번에 헤아린다
―「하지夏至」 전문
‘오뉴월 하룻볕이 무섭다’는 옛 조상들의 말은 “하룻볕”에도 훌쩍 크는 곡식들을 보며 품게 되는 시간에 대한 경외와 연장자에 대한 겸손의 표현이기도 하다. “생일이 나보다 보름이나” 빠른 동갑내기 후배도,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적 화자도 “한세상 함부로 거덜내고 돌아온 저녁놀”을 바라보며 지나온 세월을 헤아려본다.
복날과 대서를 거치며 무더운 여름을 견디어내고 나면 어느새 가을의 문턱. 뜨거운 여름 태양이 풍요로운 열매로 맺히는 가을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도 내면으로 침잠하며 시간에 대한, 세월에 대한 성찰을 계속한다.
더위는 아직 얼마든지 남아 있고
몹쓸 병이나 들었는지 여름내
걸핏하면 목이 잠긴다
언젠가는 너를 꼭 만날 것처럼
미리 목이 잠긴 채
세상일 부질없고 헛되다는 걸
한평생 헛것에 매달려 산다는 걸
나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만 같다
영영 깨닫지 못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걸 슬퍼할
가을은 이 세상에 꼭 와야 한다고
미리 목이 잠겨서
징징거리며 그시랑 운다
―「입추立秋」 전문
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어도 “가을은 이 세상에 꼭 와야 한다”고, “세상일 부질없고 헛되다는 걸 / 한평생 헛것에 매달려 산다는 걸 / 나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만 같다”고 읊조리는 시적 화자의 고백에는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인 성숙의 시간이 지난 뒤 찾아오는 겨울은 지나온 시간을 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출발을 예비한다.
햇살이 비쳐도 하늘에
더이상 무지개는 뜨지 않는다
찬바람이 하얀 눈 장만하느라
천둥도 번개도 무지개도 다 걷어먹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빚은 하얀 꿈들이 얼마나 강물에 빠져죽어야
하늘에 다시 무지개가 뜨는 건지
산마루에 산기슭에 희끗거리며
바람은 자꾸 강물 쪽으로만 눈보라를 밀어넣는다
―「소설小雪」 전문
시집의 2부는 1부의 연장선에서 시적 화자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철 들면 그때부터는 볼 장 다 보는 거라고”(「철들 무렵」), “온갖 폼 잡고 죽는” 것도 “다 술잔으로 강물 재려는 짓 아니냐고 / 탁 까놓고 안간힘 하다 가는 게 / 그나마 사람답지 않겠냐고”(「유성流星」), 그저 “느릿느릿 걷는 부끄러운 목숨”이라고 나직하게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인생’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빚어진 ‘생의 지혜’에 다름아니다.
치열한 생의 한 시기를 통과하고 이제는 여유로운 시선으로 삶을 관조하는 시인이 들려주는 통찰과 달관의 시편들은 쉴새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가 잊고 지냈던 자연의 질서와 시간의 흐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는 한 철학자의 말처럼, ‘황혼의 풍경 속’에서 지혜의 눈빛을 빛내고 있는 이 원로 시인이 앞으로 또 어떠한 시어들로 인간 삶에 대한 깨달음을 선사해줄 것인지 기대된다.
『철들 무렵』은 주로 세시풍속의 전통과 이에 상응하는 인간 삶의 문화와 자신의 생활감각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일상 속의 ‘세속적 시간’의 지배 속에서 우주적 근원의 ‘신성한 시간’을 깨우고 재생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세속화된 현실의 성화를 통해 신생의 계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 세시풍속의 문화현상은 자연을 경배하고 모시는 생명공동체의 대동적 삶을 보여준다. 따라서 세시풍속에 관한 시적 탐구는 인간 삶의 우주적 존재성과 본질을 각성시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오늘날 ‘상인의 시간’이 주도하는 현실에서 우주 생명의 시간을 추적해보는 것은 그 자체로 현재적 삶의 성화와 우주적 도(道)의 율동의 자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_홍용희(문학평론가)
▶ 정양 |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악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까마귀떼』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나그네는 지금도』 등과, 시화집 『동심의 신화』, 판소리평론집 『판소리 더늠의 시학』, 옮긴 책으로 『한국 리얼리즘 한시의 이해』 『두보 시의 이해』 등이 있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
* 초판발행 | 2009년 7월 27일
* 121*186 양장 | 96쪽 | 값 7,500원
* ISBN 978-89-546-0853-4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최유미(031-955-8865, 3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