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눈, 어리고 여린 것에 대한 응시
장석남의 시는,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대별된다. 그는 달과 별, 집과 길, 저녁해와 가파른 생애를 보고, 숨쉬는 소리와 쌀 안치는 소리, 배호의 노래, 나무들이 뿌리를 가지런히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 청각이미지들도 젖은 귀로 듣는 것이어서, 젖은 눈이 본 것, 또는 보려는 것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어리고 여린 것들에 대한 편애와 배려에서 비롯되는 따뜻함과 순함, 그리고 느림이 ‘젖은 눈의 시학’을 구성하고 추진한다. 그러나 젖은 눈의 시학이 그렇게 허약한 것은 아니다.
허약하기는커녕, 거기에는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거기에 동참하겠다는, 그것과 하나가 되겠다는 단호한 신념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고 진정한 단호함이 늘 그렇듯이 그 단호함은 섬세함과 민감함에서 나온다. _이문재(시인)
작고 여린 것, 젖은 것, 어린 것, 그늘을 보는 시인 장석남의 『젖은 눈』이 재출간되었다. 초판이 출간된 것이 1998년이었으니 꼬박 십 년 만이다. 십 년 전 그는 썼다. “오,//저 물 위를 건너가는 물결들//처럼”. 십 년 만에 다시 보는 시집, 긴 시간에도 변함없는 그 물결을 확인하는 일이다.
“내 가슴에 찾아왔던 무엇이었을까. 그러한 것이 보일 때 누군가 비라도 몰고 찾아오라. 내 가슴이 처마 밑으로 누군가 찾아오시라. 같이 물소리라도 감상하시게……”(시인의 말, 「가슴 닮은 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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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것들은 대개 안쓰럽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여리고, 순하며,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이 약한 모습이다. 장석남의 눈은 젖어 있다. 그 젖은 눈으로 보는 풍경은 건드리면 울음이 툭 터져나올 것 같은, 가득 차오른 만조(滿潮)의 모습이다. 그 물무늬들이 모여서 나무도 되고, 봉숭아도 되고, 새와 바람도 된다. 그러다가 결국엔 마음이 된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어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_「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중에서
시인의 마음은 ‘작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처럼 여리다. 조그마한 멧새가 앉았다가도 흔들리는 얇은 나뭇가지처럼,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유하다. 윤동주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면 장석남은 멧새가 앉았다 간 마음 아래 가늘게 떤다. 떤다는 것은 무엇인가. 움직이되 그 진폭이 좁고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움직임이란 소리다. 그래서 젖은 눈은 마음의 육체다. 고원한 정신이나 사상이 아닌 우리가 실제로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런 풍경의 육체다.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_「봉숭아를 심고」 중에서
이 시에서 ‘젖은 눈’의 바라봄은 “쪼그리고 앉는”, 그리고 “조심히 물을 뿌”리는 행위를 동반한다. 시선은 곧 행위가 된다. 그리고 그 행위에서 풍경과의 동화(同和)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서정이 된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외로움이든 서러움이든 어떤 임계점을 넘어야 서정이 된다. 넘어서야 깊어지고 깊어져야 다시 흐를 수 있다. 흐르다가 스며서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다.
그 흐르고 스며드는 시선, ‘젖은 눈’은 그래서 지독한 난시(亂視)다.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이 창조의 눈은 마구잡이여서 이곳저곳 어디든 스며들고, 그 안에선, 밤비에 후득이는 오동잎도 우리 생이 된다.
그렇지, 밤비 후득이는
오동잎이
우리 생이지
후득여도 너울대는 게
그게 생이야
소주 생각 간절한 밤비 속
우리 생이야
_「밤비」 중에서
그의 시는 맑다. 새의 죽음조차도 맑다. 그 빈자리는 빈자리대로 맑다. 이 맑음이 여리고 순한 것들에 대한 가없이 따스한 응시를 낳았다. 이 응시는 고요하다. 몰래 숨어 피는 꽃처럼 그저 소리없이 그 새순을 틔울 뿐이다. 그래서 ‘젖은 눈’의 응시는 나약하지 않다. 오히려 나약함은 나약함 그 자체가 되어 나약하지 않은 것들을 이겨낸다. 여린 것들에 대한 그 지독한 편애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게 어쩌면 장석남 시인의 몫이었으리라. 우리는 그의 위로를 달게 받으며 이 시집의 마지막 장을 쉽게 덮지 못한다.
* 초판 발행 2009년 4월 20일
* 121*168 양장 | 120쪽 | 7,500원
* ISBN 978-89-546-0793-3 0381
* 책임편집| 조연주, 이경록(031-955-3572, 8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