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과 『달의 제단』(제6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단 두 작품으로 평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의 독보적인 자리를 마련해온 작가 심윤경의 신작 장편.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독특한 이야기로 빚어내는 그만의 매력이 돋보인다.
“나는 이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입니다.”
소설은 이진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스스로가 밝히는 대로, 그녀는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이며 그것만이 존재의 전부인 사람이다. 그녀는 원한 맺힌 죽은 이들이 아닌 생령(生靈)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 그러하냐는 질문은 소용이 없다. 그녀는 기억할 수 없이 어릴 때부터 영혼들을 보기 시작했고, 본성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쓰게 되었다.
그녀가 하는 일처럼, 그녀 역시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다. 영혼을 기록하는 일 외에 다른 현실적인 일에는 철저하게 무심하고 무력하지만, 그녀는 빙하에서 솟아오른 듯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이다. 그런 그녀를, 한 남자가 사랑하게 된다.
“내 이름은 이현. 영혼을 기록하는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
남자는 재정경제부에서 일하는 전도유망한 엘리트 공무원이다. 남자는 어렸을 때 자신의 영혼을 뒤흔들어놓았던 여인의 모습을 그녀, 이진의 얼굴에서 다시 보았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영혼을 기록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는, 그의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그는 그녀의 작업을 절대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삼 년간의 한시적인 계약결혼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진의 아버지인 왕족 이세 공(公)의 저주 섞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성취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상과 사랑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녀와의 결혼생활을 위해, 그는 보답 없는 헌신과 의문과 모욕을 한없이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어느 날, 이현과 재정경제부 장관과의 관계에 대한 이진의 기록을 이현이 발견하면서, 둘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비극, 사랑
이진을 향한 이현의 치명적인 사랑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예고된 파국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는 당당한 비극적 정신이다. 그것이 불가능함을 예감하면서도 사랑에 제 몸을 던지는 이현, 그리고 그 파국의 결과를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전작 『달의 제단』의 주인공 상룡의 무모한 사랑과 비극적인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전작 『달의 제단』에서 세간의 가벼움과 발랄함에 맞서 ‘뜨거운 옛날식의 정열’을 지켜가겠노라 천명했던 작가는 이야기의 무대를 현대로 옮겨 더욱 탄탄한 고전적인 이야기를 완성해냈다. 전통적 미덕과 현대적 감각을 절묘하게 아우르는 그의 미덕은 그래서 이 작품 『이현의 연애』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 이현과 이진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소설의 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는 ‘이진의 기록’은 각각 독립적인 별개의 이야기이면서 소설의 진행에 따라 중심서사와 서로 맞물리는 특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 네 편의 ‘이진의 기록’은 앞서 발표되었던 작가의 단편들을 포함하고 있다.
‘토토로의 집’ ···························『문학동네』 2005년 봄호
‘라 캄파넬라’ ···························『작가세계』 2005년 여름호
‘창세기’ ···································· 신작
‘외알 안경을 낀 사나이’ ········ 신작
기록하는 셰에라자드와의 비극적 연애
순수한 듯 속물스럽고 닳아빠진 듯 고지식한 이현의 모습은, 일생을 걸어 진실만을 사랑하리라 믿었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닮았다. 무언가 안에서 뜨겁게 치미는 것을 꿀꺽 삼키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어쩐지 나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한편 나는 편집적으로 은둔만을 고집하던 이진의 마음 또한 알 것 같다. 사랑한다는 애타는 고백 따위엔 한없이 냉담하고 무관심한, 세상의 속박이 팔과 다리를 억압해도 까짓것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그 별난 여자의 마음을 말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심윤경은 이번 소설에서 자신 있게 자신의 인간관과 문학적 태도를 드러낸다. 진지함과 열정, 진리 탐색이 마치 지난 연대의 후일담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그녀는 비극의 정신을 당당하게 들고 나와 가벼운 현실을 암묵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예고된 경고들이 하나 둘씩 실현될 때 갈등과 치부를 감추지 않고 그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바치는 희생제의를 당당하게 치를 수 있는 정신, 성공을 장담할 수 없지만 끝까지 고통과 함께 가겠다는 인간의 모습을 작가는 명료하고 유려한 언어를 통해 과감하게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고통과 슬픔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있어야 드러날 수 있는 비극적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비극적 정신을 원천적으로 방해하거나 해체시키는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교묘하고도 참혹한 무대 위에 과감하게 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_정혜경(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