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
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꽃을 샀다
새를 샀다
수수께끼 같은 스무 고개 중턱에 닿아
더이상 내게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나는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
치마와 신발을 샀다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췄다
시장통 난전판에 핀 내 아홉 꼬리 어지러운 춤사위나 보라지
꼬리 끝에서 절걱대는 얼음별 얼음달이나 보라지
나를 훔쳐 나를 사는
꼬리는 어느새 잡히지 않는 나의 도둑
당신에게 잘라준 내 예쁜 꼬리 하나는
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여우」 전문
세공의 필치와 상상력의 건축술로 이루어낸 감각의 묵시록
우리의 일상을 에워싸고 있는 미시적 사물들을 독특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시인 류인서가 두번째 시집을 펴냈다. 첫 시집 이후 사 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특유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평범한 사물들의 표층 너머 깊이 숨겨진 속성들을 응시하고, 그 속에서 이 시대와 삶의 복합적 비의(秘義)를 포착해낸다.
저 늙은 느티나무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한때 저 느티나무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저곳에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발빠른 늑대의 시간들이 유행을 낚아채 달아나고
길 건너 유리로 된 새 빌딩이 노을도 데려가고
곁의 전봇대마저 허공의 근저당을 요구하는 요즘
하숙집 문 닫을 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
―「느티나무 하숙집」 전문
이 시집에서 시인은 특히, 이 가혹한 속도의 시대에 밀려 사라져가는 것들에 주목한다. 어떤 사물이나 시대의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이 쇠락하거나 사라진 지금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비애를 잔잔하게 노래하는 것이다. 이것은 “저 공공연한 노숙의 옷자락을 시속 삼백 킬로미터 굉음으로 스쳐가는 고속열차/속도가 빠져나간 역사”(「공공연한 미술관」)를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이나, “시골집 수돗가 거울이 마지막 반짝 빛나던 때”를 “이삿짐 나가고 식구들 다 떠나고 담장 밖 능소화가 적막한 등불 하나 걸 때”(「거울」)로 회상하는 시인의 기억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시인은 이처럼 시간의 흐름에서 탈락되어 버려진 사물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시인만의 독특한 발상으로 구축한 생생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우리 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빛들은 홀연히 램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진 모든 것들이 그 이상한 동쪽 끝방에 갇혀 있으리라 믿는 처녀들
끝없이 램프의 캄캄한 구멍 속을 훔쳐본다
얼룩수염을 가진 램프의 거인은
처녀들의 엷은 분홍 눈꺼풀을 덮고 잠들어 있다
동쪽 맨 끝방을 여는 오래된 열쇠는 거인의 헝클어진 수염 끝에 단단히 묶여 있다
(……)
어느 아침
램프는 울컥, 삼켰던 모든 것들을 제 그늘 안에 쏟아놓는다
거인은 사라지고 동강난 열쇠와 녹슨 정조대, 부러진 새들의 발목
호호백발 백년 전의 처녀들만 햇빛 아래 소복하다
―「처녀들의 램프」 중에서
독설가인 너는 보수 일색의 이 도시를 고담시(市)라 부른다
오늘은 이 고담시에 흉흉한 황사가 떴다
배트맨의 검은 망토자락 같은 조커의 붉은 외투자락 같은 사막의 날개
갈피없이 뒤엉켜 해를 가렸다
창을 닫고 방방마다 등을 켜두었다
흔들리는 황사 스크린 위로 혼절한 태양이 떠오르고
박쥐 선글라스와 마스크에 얼굴을 묻은 사람들이
말없는 빠른 걸음으로 환란의 거리를 지나간다
종이 울린다 동굴보다 깊은 복도 저쪽에서
우- 우- 한 떼의 어여쁜 승냥이 소년들이 몰려나온다
오늘 비로소 고담시(古談市)가 고담시다워진 것이다
―「황사」 전문
시인의 관심은 단지 사라져가는 것들을 돌아보고 불러세우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시집에는 표제작 「여우」나 「처녀들의 램프」처럼 우화, 동화 등을 재구성해 아름답게 풀어낸 시편들, 「황사」와 같이 영화, 소설 등과의 상호 텍스트성이 확연하게 감지되는 시편들이 적지 않다. 이런 시편들은 텍스트를 고착된 정전(正典)이 아닌 끝없이 유동하고 상호 연관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시인이 시각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을 해석하고 다루는 시인의 유연한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
류인서의 시는 “백 개의 눈 백 개의 혀를 가진 꽃”이다. 기억의 영지에 파릇하게 돋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시들은 낯설고 기이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민담, 설화, 동화, 영화, 소설의 젖을 빨고 그 자양분으로 상상세계를 꽃피운다. 거기서 얼음접시, 물배꼽, 유리구두, 접시거미, 그늘하숙, 울음더위, 종이거울, 그늘나비, 고담시, 세상의 동쪽 끝방, 깜빡죽음 저 나라, 구름 난전 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삶의 지루함과 비루함을 견디려는 유희 본능이 빚은 것들. 시인은 누추한 기억들, 그 천일야화에 상상의 도금을 입힌다. 그것은 “추억의 봉합사로 감쪽같이 꿰매붙여 다시없는 변종품으로 세간”에 내놓는 것, “일종의 도굴 프로젝트”이자 “일종의 연금술”이다. 시인은 “세상 가득 떠다니는 글자들의 파편”을 모아 몽상을 꽃피우고, 사물들 “사이에서 넘쳐흐르는 낯선 세계의 즐거운 멜로디”를 연주한다. 그의 시들은 푸른 수염의 거인에게 붙잡혀가 돌아오지 않은 처녀들의 노래, 그 “세상의 동쪽 끝방”에서 부르는 슬픈 아리아다. _장석주(시인)
우리가 읽어온 류인서 시편의 감각적 구체성과 활달한 유동성은, 환상이나 신화적 요소를 넘어 훨씬 더 멀리 존재하는 궁극적인 ‘사물의 말’을 들려준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불모성을, 구체적이고 상상적인 감각의 묵시록으로 탁월하게 보여준다. 이제 우리가 그 세계의 일회적이고 고유한 그리고 심미적인 아우라를 경험할 차례이다. _유성호(문학평론가)
* 초판발행 | 2009년 3월 12일
* 121*186 | 124쪽 | 값 7,500원
* ISBN 978-89-546-0776-6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서현아 (031-955-8865, 8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