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기억” 속에서 삶을 노래하기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을 삶이라 한다면 그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특별한 일 없이 늘 같아 보이는 일상의 틀 안에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사는 일을 시라 한다면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박철은 그렇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산책을 하는 몇 줄의 일상으로, 시를 이야기한다.
아빠는 마음이 가난하여 평생 가난하였다
눈이 맑은 아이들아
너희는 마음이 부자니 부자다
엄마도 마음이 따뜻하니 부자다
넷 중에 셋이 부자니
우린 부자다
_「반올림」 전문
박철의 언어에는 꾸밈이 없다. 그의 ‘시어’는 대체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다. 그저 시인이 살고 있는,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담하게 써내려갈 뿐이다. 시인의 일상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를 하고,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가끔 옛일을 추억하는 ‘보통의 풍경’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소한 기억과 일상의 언어로, 그는 시를 짓고, 삶을 노래한다.
“말의 계단을 오르다 돌아보면 이젠 낯익은 향기. 그 속에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가, 꽃처럼 아름다운가를 노래하고 싶었습니다.”(‘自序’ 중에서)
나처럼 세월을 일없이 소일하되 늘 근심이 많고 우울하고 조바심이 강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 못 된다 게으른 사람은 욕망이 없다 나는 반대로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남을 위해 좋은 일도 해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 중 단 한 가지도 못 이루고 있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 못 된다 나의 슬픔은 그런 나를 세상이 게으르거나 나태한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다만 가난한 사람이다
_「게으름에 대하여」 중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가 쓴 「게으름을 말한다」를 읽던 시인은, ‘세상이 자신을 게으르거나 나태한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고백한다.
시인 이문재는 오래 전 「석류는 폭발한다」라는 시에서 이런 게으름을 찬양했다. 그에 의하면 이 ‘게으름’은 일반적인 ‘게으름’이 아니고 ‘오로지 중심을 향하는 힘’이다. 오로지 홀로 중심으로 향하다보니 밖에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 ‘게으름’은 정녕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치열함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게으른 이 시인은 역설적으로 가장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된다. 비록 세상이 그를 그렇게 봐주지 않을지라도 꾸준히 시를 쓸 수 있는 힘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시인은 시집 전체에 걸쳐 세상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문학의 자존심이 인류의 미래”(‘自序’에서)라고 말하는 그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이 곧고 굳은 마음이 고르게 퍼져 삶에 스며들고, 기어코 은은하게 시인의 밖으로 배어나오고야 만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오 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오십 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오늘은 내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제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_「행주강」 중에서
일산으로 이사와 강가를 거니는 한가로운 풍경 속에서 시인은 “다시 사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이 아름답기 때문’이므로. ‘나’는 외롭고 인생은 아름다우니, 사랑밖엔 도리가 없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세상의 그늘에 불을 지피는 일이다.
나는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
세상의 그늘에 기름을 부어야겠다
불을 지펴야겠다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새로운 안식처에서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한번 해야겠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서설이 내리기 전 하나의 방을 마련해야겠다
_「불을 지펴야겠다」 중에서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고 말하는 시인이지만, 그 글이 놓인 자리에서 외로움은 스러진다. 그렇게 “세상의 그늘에 기름”이 부어지고, 그 자리에서는 세상 모든 겨울을 녹이는 ‘불’이 지펴진다. 시인은 그렇게 “불을 지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불꽃 앞에서 데카당스니 페시미즘이니 하는 것들은 순식간에 타올라 재가 된다. 외로움조차 긍정하게 되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일가(一家)를 이룬다. 나 혼자 살자고 지피는 불이 아니다. 널리널리 퍼져 온 세상을 밝히는 박애(博愛)의 불빛이다.
박철에겐 일상이 시이고 시가 곧 일상이다. 굳이 말을 깎고 비틀어 매달지 않고도 시인은 날것의 서사와 감정을 적확하게 노출한다. 누구나가 겪고 느끼는 “사소한 기억”과 일상의 마디마디를, 돌려 말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세상을 향한 단호하고도 따뜻한 애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시의 자리를 거닐고 있는 것이다. “한 권의 시집”이 아니라 “한 권의 시”를 묶고 싶다는 시인 자신이 밝혔지만, 그것은 어쩌면 ‘한 권의 인생’일지도 모른다.
박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세계 안에 끌어오는 일보다는, 벌써 보이는 것들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지만 마음들이 내팽개쳐 버린 것들의 먼지를 닦고 당신들이 찾는 것이 여기 있다고 가만히 말하는 일에 더 치열하다. 그는 그것들을 「사소한 기억」이라고 부른다. 순수시이건 정치시이건, 겉으로 치열한 시이건 속으로 치열한 시이건, 모든 시가 확보하고 지키려는 것이 그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박철을 치열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치열함을 배반하는 꼴이 될 것이다. _황현산(문학평론가)
▶ 박철 |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단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창작과비평』에 「김포」 외 열네 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김포행 막차』『밤거리의 갑과 을』『새의 全部』『너무 멀리 걸어왔다』『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험준한 사랑』『사랑을 쓰다』, 소설집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 어린이를 위한 책 『옹고집전』『선비 한생의 용궁답사기』『김포 아이들』 등이 있다.
* 초판 발행 2009년 3월 2일
* 121*168 양장 | 116쪽 | 7,500원 |
* ISBN 978-89-546-0775-9 03810
* 책임편집| 조연주, 이경록
(031-955-3572, 8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