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작가와 예술가들, 세상의 잡답과 사람들에게 치여 상처받은 사람들이
심신의 치유와 회복을 꾀하며 또는 창작에의 열정과 기대로
그림자처럼 조용히, 소문 없이 춘천으로 숨어든다고 하였다.
춘천, 그가 내 안에서 사는가,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가.
_오정희, 「봄내 이야기」에서
이승훈, 오세영, 오정희, 전상국, 유안진, 최수철, 이문재, 박형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29인이 한 도시에 모였다.
이 각양각색, 세대를 넘나드는 당대의 작가들을 한데 불러 모은 장소는 바로 청춘과 낭만의 도시, 춘천이다.
빛나는 청춘의 한때, 흥겨운 MT 장소로, 설레는 데이트 코스로 춘천을 스쳐가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우리 문단의 내로라하는 절창의 시인들과 걸출한 이야기꾼들이 풀어내는 춘천의 기억은, 저마다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그 뜨겁고도 아스라한 청춘의 한 시절을 생생하게 불러낸다.
따뜻한 봄날 ´더벅머리 김유정이 점순이를 데리고 놀러´ 나올 듯, 또 고요한 청평사에서 처음 만난 이와 기적 같은 사랑에 빠져들 듯도 한 낭만과 서정의 도시, 춘천.
지금 이 책을 열면 29인의 문인들이 펼치는 청춘의 난장이 시작된다.
춘천, 그 뜨겁고도 알싸한 청춘의 중심지
서울에서 춘천까지 두 시간 거리.
춘천은 가는 길마저 아름답다. 산과 물을 끼고 굽이굽이 휘도는 경춘가도를 따라, 혹은 차창에서 눈을 떼기가 아까우리만치 압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경춘선 열차를 타고 내려가다보면, 3면이 물로 둘러싸인 호반의 도시, 춘천이 문득 물기에 젖은 파란 얼굴을 내민다.
볼 거리, 먹을거리, 놀 거리 무궁무진한 춘천에서 많은 작가들이 단연 춘천의 명물로 첫손에 꼽은 것도 이 호수와 그 주위로 밤낮 없이 피어오르는 ´안개´다.
춘천 태생 시인 이승훈은 책의 첫머리를 열며 고향 춘천의 호수와 안개를 이렇게 묘사한다.
30대에 춘천에서 만난 것은 안개와 호수지만 춘천의 안개는 아름다운 신비와 우수와 환상이 아니라 깊은 밤 흐느끼는 울음소리였다. (…) 뭉크를 사로잡던 불안, 회색빛 청춘, 우울한 동경, 황량한 그리움은 당시의 나의 초상이고 춘천의 내면이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오롯이 춘천에서 보낸 소설가 한수산 역시 ´청춘의 가장 반짝이던 때´ 그러나 그런 만큼 더욱 ´가슴 저리고 쓰라리고 하염없는 그 시절을 보낸 곳´으로서의 춘천을 회상하며, ´안개, 그것은 내 청춘을 적셔준 춘천의 상징이었´노라 고백한다.
닭갈비와 막국수, 강촌역과 청평사, ‘관광지’로서의 춘천을 다녀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춘천´ 하면 먼저 떠올리는 단어들의 목록은 대체로 이 언저리를 맴돌 테지만, 춘천에서 젊은 날의 상처를 다독이며 세월을 지내온 문인들에게는 춘천의 ‘안개 낀 호수’야말로 그대로 청춘의 메타포로 각인되었던 것이 아닐까.
돌아보면 누군들 그러하지 않으리.
청춘이란 원래 그 시절을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곧잘 꽃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겐 더없이 춥고 습한 계절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20대의 7할을 춘천에서 보냈다는 소설가 이순원이 써내려간 이 청춘의 전언은 안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젊은 문청들의 속내를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다.
매혹과 두려움을 한몸에 품고 있는
황홀경의 도시
그런가 하면 춘천을 과거의 추억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일상공간으로 살아내고 있는 문인들, 지금 이 순간에도 춘천의 안개와 호수를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춘천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문인들이 있다.
시인 유안진은 이 책에서 ´어느 날 문득 춘천이라는 이름이 나를 사로잡았고, 내 혼을 기습 점령해버렸다’며 춘천이 전해준 압도적인 영감을 그려냈고, 소설가 함정임은 ´춘천,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블랙홀이자 황홀경. 내가 흠모하는 영혼들은 그곳에서 왔거나 그곳으로 갔다’고 기록하며, 묘한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키는 춘천의 매혹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에 더해 춘천이라는 도시에 수십 년 간 기꺼이 사로잡히고 매혹당한 채 ‘춘천’이 그대로 ‘작품’이 되어버린 문인들도 있으니, 그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오정희와 전상국이다.
우연히 남편을 따라 내려간 춘천에서 3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며, 「파로호」 「옛우물」 『새』 등 춘천을 배경으로 한 역작을 잇달아 집필한 소설가 오정희. 그리고 김유정 문학의 산실 실레마을에서 김유정 문학촌 촌장으로 일하며 「아베의 가족」 「동행」 『유정의 사랑』 등 춘천 사람들의 삶과 정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한 전상국. 전상국은 전업작가가 되어 훌훌 다 털어버리고 여기저기 떠돌고 싶어했던 자신을 매번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했던 춘천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사람들과의 밀고 당기기의 탐색과는 달리 온통 덧셈이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두 개의 그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닌 그와 그가 되고 싶은 그가 완전한 화해를 하는 곳이 바로 자연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연 앞에서 거침없이 감동했고 그 충만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염인 증세도 사라졌다.
´김유정에게 미친 사람´으로 소문나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조차 ´김유정은 당신 같은 아들을 두어 참 좋겠다´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그가 끝내 춘천을, 실레마을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은, 춘천의 산하가 지닌 이 비상한 치유의 능력 때문은 아닐까?
사계절 봄이 흐르는 마을, 춘천!
청춘의 노스탤지어와 숨은 명소를 찾아 떠나는 낭만도시 기행
이렇듯 이 책에는 춘천의 어제와 오늘을 가로지르는 문인들의 애틋한 추억담과 함께, 춘천 각지의 명소와 명물들이 소개된다. 청평사와 강촌, 소양댐, 의암호, 춘천호, 공지천, 실레마을 등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곳은 물론이거니와 에티오피아에서 직접 공수해오는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이디오피아의 집´, 최근 한 마을에서 114번째 박사를 배출하며 화제가 된 ‘박사마을’과 의암댐에서부터 춘천댐까지 눈부신 절경이 이어지는 ‘환상의 도로’에 이르기까지, 춘천의 숨은 명소들이 낱낱이 소개되어 있어, 독자들은 여행서로, 또 문인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관광가이드로도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7, 80년대 춘천의 옛 풍경들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는 점도 이 책의 특색 중 하나다. 소설가 이외수가 한때 ‘죽돌이’ DJ로 근무했다는 전원다방, 국내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KBS드라마 <첫사랑>의 촬영지였던 ‘육림극장’과 요선터널 등, 지금은 부러 찾아가도 직접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이 추억의 명소들은 이미 청춘을 지나온 세대들에게도 짙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예나 지금이나 춘천은 여전히 청춘의 중심지이다.
그곳에는 누구에게도 토해낼 길 없는 젊은 청춘들의 가슴 시린 방황이 있고,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 보헤미안들의 낭만이 있다.
미로와 같은 수많은 골목길마다 온갖 사연들을 품고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 춘천.
다가오는 봄, 이 책에서 29인 작가들이 저마다의 입담으로 구성지게 풀어낸 춘천 이야기를 떠올리며, 한 번쯤 경춘선 열차를 타고 훌쩍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춘천― 그곳에 가면 청춘의 열병마저 싱그러운 봄빛으로 식혀주는 호수가 있고, 우리가 사랑한 문인들의 상처와 방황까지도 가만히 품어 안아준 안개가 있다.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이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춘천이니까.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중에서
***************
춘천을 사랑한 문인들,
나에게 춘천은......
아련하고 그립고, 아름답고, 조금은 슬퍼지는 춘천, 내 잃어버린 젊은 날의 소중한 그 무엇이 지금도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춘천. 서울처럼 각박하고, 이기적이고, 모질고, 경쟁적인 사람들로 들끓는 공간의 지척에 춘천같이 순결한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우리 국토가 우리에게 내려준 얼마나 큰 축복인가.
_오세영(시인)
청춘의 황금연못. 청춘의 가장 반짝이던 때, 가슴 저리고 쓰라리고 하염없는 그 시절을 보낸 곳으로서의 춘천은 나에게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_한수산(소설가)
길을 걷다 어느 때든 숨을 수 있는, 계단에 앉아 저 아래로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보며 쉴 수 있는 나만의 성소. 춘천의 골목길들은 모두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_김도연(소설가)
강을 따라 흘러가던 경춘선 기찻길은 그때까지 내가 보았던 어느 풍경보다도 아름다운 세상을 내 앞에 펼쳐 보였다. _안정효(소설가, 번역가)
춘천, 얼마나 부둥켜안고 싶었던 곳인가, 얼마나 살 비비고 싶었던 곳인가. _박상우(소설가)
춘천, 내가 세운 유토피아적인 국가의 명실상부한 수도. _오탁번(시인)
기차는 곧 춘천행 기차였다. 경춘선을 탄다는 것은 일상으로부터, 학교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비탈이 있었던가. 그러나 비탈에 설 때마다 나는 춘천을 떠올렸다. _이문재(시인)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름다움이 절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그 아름다움 앞에서 초라한 내 상처들이 만져져 울고 싶었다. _신달자(시인)
춘천은 나에게 인간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절히 알게 해준 공간이다. _조성기(소설가)
팬터마임처럼 말하지 않아도 수많은 의미를 쏟아내는 도시, 안개처럼 경계를 해체해 더 많은 것을 수용하는 도시. _김다은(소설가)
춘천은 항상 감각적으로 내 속에서 넘쳐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강하게 드는 생각인데, 예전에는 춘천을 사랑했다면, 이제는 내가 춘천의 일부라는 느낌이 절실합니다. _최수철(소설가)
*발행일 | 2009년 2월 25일
*판 형 | 140*190
*쪽 수 | 340쪽
* 값 | 13,500원
*ISBN | 978-89-546-0770-4 03810
*담 당 | 이연실 (031-955-2651, pro@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