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 한옥으로 이사간 율이네, 그들이 사는 방식
한옥은 지켜야 할 전통가옥을 넘어, 이제는 한 개인의 삶의 형태를 말해주는 스타일이 되었다. 북촌의 한옥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한옥은 고래등 같은 큰 집도, 현대식으로 그럴싸하게 리모델링한 집도 아니다. 우리가 80년대 후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아파트로 이사하기 이전에 살던 어린 시절의 바로 그 집이다. 효자동의 아기자기한 골목에 자리 잡은 30평 남짓한 작은 한옥.
그런데, 왜 율이네는 아파트에서 한옥으로의 이사를 결심했을까? 곧 치열한 교육현장에 뛰어들어야 할 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고, 세간을 더 늘여도 모자랄 30대 초반의 부부가 말이다.
이들은 치열한 삶의 형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바쁘게 사는 건 좋은데, 왜 여유마저 없어야 할까? 바삐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느리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에 빠져 있던 율이네는 한옥을 내놓기로 했다는 지인의 연락에 망설임 없이 이사를 결심한다. 저자가 조급한 마음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젊은 시절, 마음 한 자락을 놓고 위로를 받았던 곳이 바로 ‘한옥’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집이 채우고 감출 것(빌트인)을 요구한다면, 한옥은 철저하게 비우고 올 것을 요구한다. 한옥은 모든 것이 하늘 아래 고스란히 노출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이네가 이사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비우고 또 비우는 것이었다. 비움을 통해 더욱 넉넉해지는 마음과 집과 소통하며 사는 삶을 깨닫는다.
디자이너 엄마, 아빠 그리고 감수성 예민한 아들의 슬로 라이프
율이네 한옥살이가 더 특별한 이유는 이 가족의 마음가짐 때문이다. 손맛이 제대로 살아 있는 슬로 디자인을 지향하는 디자이너 부부는 일과 삶의 모습이 닮아 있다. 이사하면서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한옥에 배어 있는 시간의 때를 고스란히 간직하기로 마음먹고, 최소한의 공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금씩 천천히 손을 보며 자신들의 집으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또한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한 율이는 한옥에 살며 느낀 것들을 아이만의 방식(그림)으로 보여주는데,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음을 느낄 수 있다. 집을 선택하는 것은 늘 어른의 몫인 듯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 집 부부는 이사를 결정하기 전에 아이에게 먼저 집을 보여주고, 의견을 묻는다. 세 식구가 모두 동의한 가운데 이사한 집인 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들로 가득하다.
기존의 인테리어나 집을 다룬 책이 최신의 유행을 이야기하거나, 더 그럴듯하고 반듯해 보이는 법을 이야기한다면, 이 책은 그런 유행에 살짝 물러나 있다. 율이네는 집은 물론이고 큰 가구든 작은 수저든 모두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쓰는 작은 수건 하나에도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생각하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율이네 집. 그들의 집은 작지만, 집과 함께하는 마음만큼은 넉넉하다. 이들의 한옥 살림 이야기는 겨울 저녁, 아랫목에 배를 깔고 호호거리며 먹던 고구마의 따뜻한 맛이 난다.
우리 손으로 고쳐나가는 일들
한옥을 현대식으로 고쳐 쓰는 일이 많은 요즘, 율이네는 최소한의 공사만 하기로 마음먹는다. 짐을 정리하는 일부터 공사의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들려준다.
마루 이야기
집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아파트와 달리 방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겸하는 한옥 마루.
부엌 이야기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과 그릇 모으기가 취미인 아내의 부엌 만들기. 언제나 고구마 익는 훈기로 가득한 그들의 부엌에 먹거리에 대한 즐거운 고민이 보태진다.
안방 이야기
좁은 부엌 때문에 안방으로 들인 냉장고도 너무 많은 짐도, 정리가 안 된다. 안방은 밖에서의 시름을 모두 내려놓는 공간인데, 오히려 걱정만 늘어간다. 그런데 해결방안은 자연이 가지고 있었다.
아이방 이야기
아파트에서 아이들이 뛰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아이에게 뛰지 말라고 말하는 나는 정상적인 엄마일까? 비정상적인 엄마일까? 한번쯤은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율이네는 이런 고민에서 벗어났다.
마당 이야기
한옥으로 이사오면 마당에 잔디를 깔고 싶었다는 율이네, 기어코 깔았다. 잔디는 이 가족에게 자연이 품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알려준다.
엄마의 소품 이야기
오래되어 버려질 물건들의 새로운 쓰임새를 알려준다. 삶에 향기를 더하는 바구니와 질그릇의 장점과 손으로 만드는 일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아빠와 아이의 요리 이야기
아이는 요리를 놀이로 인신한다. 그리고 아빠의 요리를 도우며 자신이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워한다. 아빠와 아이가 쉽게 만들 수 있는 세 가지 요리와 율이네의 소풍 도시락 이야기가 함께 한다.
가족 소개
엄마 조수정
손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요리를 빼고 무엇이든 좋아하는 지은이 조수정은 대학에서 의상학을 공부하고 오브제/오즈세컨과 쌈지에서 비주얼 머천다이저로 일했다. 그러다 2000년 12월 남편과 함께 손맛이 살아 있는 디자인 문구 브랜드 ´공책 디자인 그래픽스(O-CHECK DESIGN GRAPHICS)´를 만들었다. 쓸모 있는 물건 못지않게 마음에 필요한 물건들의 소중함을 아는 그녀는 문구 브랜드 ´공책´을 확장해, 리빙 디자인 회사 ´스프링 컴 레인 폴(SPRING COME, RAIN FALLl)´을 남편과 함께 설립하여 현재 디자인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요리하는 남편과 자전거 타는 아들이 보이는 마루에서 예쁜 소품을 만드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며, 천천히 흐르는 삶의 소중함을 알려준 한옥이 너무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아빠 권재혁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하고, 우리나라 굴지의 패션대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2000년 12월 부인과 함께 ´공책 디자인 그래픽스´를 만들었다. 현재 ´스프링 컴 레인 폴´ 대표로 있다.
아들과 함께 요리하기가 취미인 그는 한옥 마당에 숯불을 피우고 야채와 고기를 구워, 가족과 집에 놀러온 손님에게 맛보이기를 무척 좋아한다. 이탈리안 요리를 넘어 요즘은 임금님 수라상보다 다양한 한식을 선보이며, 가족들의 배를 빵빵하게 불려주고 있다.
아들 권율
꿈과 호기심이 많은 건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데, 유난히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일곱 살이다. 매일 보고 느낀 주변의 일들을 신기하다는 듯 들려주곤 한다. 율이의 이야기에 엄마와 아빠는 그동안 하찮다고 넘겼던 삶의 세밀한 결들은 매일매일 느끼며 산다. 일하는 엄마와 아빠를 둔 탓에 늦게까지 깨어 있는 일이 많지만 괜찮다고 한다.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면 되고, 그러면 다음 날 유치원에 가지 않아서 좋다고 말하는 느긋한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