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바닷속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문자들, 그 기호들의 우주적 숨쉬기 출렁이는 파도, 바람에 펄럭이는 치맛자락, 끊임없이 일렁이며 바스라져 뭐라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 눈에 보이는 확고한 것,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 배후에 존재하는 것들에 천착해온 평론가 신범순이 ‘이상향에 대한 꿈’이라는 주제로 최근 발표했던 글들을 엮었다.
이 책의 중심에 놓인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상향에 대한 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의 정신세계에 파인 신비한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용에 대해 나는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황금시대가 펼쳤던 신화와 꿈이 있었다. 미당과 니체의 용의 바다에 대해 논하면서 그러한 신화가 현대인의 정신세계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싶었다. ―머리말 중에서1부에서는 정신적 은신처로서의 이상향인 무의식 또는 꿈을 분석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현실이 실은 너무나 강력한 허구일지 모른다는 의심과 한 시대 전체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 욕망을 세상과 조화시킬 수 있는 이상향이 필요하다. 이때 이상향이란 한 인간이 자신의 정신세계에 구축할 수 있는 안식처를 뜻한다 할 수 있다. 신범순은 그 예로 신광한의 「안빙몽유록安憑夢遊錄」에 나타난 안빙의 괴이한 꿈을 들고 있다. 안빙의 꿈은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가적 이념을 기이한 세계의 동굴 속으로 이끌어가면서 그 경직된 구조를 용해시킨다. 여성적 모체를 떠올리게도 하는 이 꿈의 동굴은 통과제의가 이루어지는 통로이고,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며, 다른 세계의 입구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꿈이란 의식에 뚫린 동굴이라 정의할 수도 있다. 2부와 3부에서는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 뚫린 이상향으로서의 동굴, 즉 꿈을 모티프로 소월부터 미당, 오탁번, 서림까지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를 분석한다. 옛 사람의 정신세계에 숨어 있는 신화와 꿈이 현대인의 정신세계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문학이 꿈꾸며 나아가야 할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4부에 담긴 사이버 시대의 시의 향방에 대한 고민과,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와 <취화선>에 나타난 유랑예인의 삶과 예술에 대한 글은 저자의 다양한 문화적 관심과 예술적 취향을 보여준다. 신범순은 이 책에 실린 글 「혼돈의 카니발적 탁자」에서 이상(李箱)에 대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아니 그러한 것들을 조작해내는 사람들과 제도들, 그러한 것들을 창조해내는 관념과 지식체계들 이 모두에 대해 회의하고 부정했던 몽상가”라 칭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를 신화와 꿈이 살아 있던 시대를 ‘황금시대’라 지칭하는 신범순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어도 무방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