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인간의 위기에 맞서
평론집의 제목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은 그 자체로 분명한 현실인식과 지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혀도 무방하다. 작금의 시대는 곧 진흙인 천국이고, 그곳에서 시란 주술과 같은 어떤 것이라는 것. ‘진흙 천국’이란 주지하다시피 이성복이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서 쓴 말로, 그는 고통이자 열락인 이 생을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의 시를 ‘진흙 천국의 생에 복수하는 시적 주술’이라 이르거니와, 이런 수사는 디지털 시대의 도취와 황폐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것이 바로 시여야 함을 힘주어 주장하는 1부의 논지와 맞닿아 보다 현실적인 의미를 얻는다.
시와 독자와 종교, 그리고 문학 교육에 대한 평문들을 모은 이 책의 1부에서 저자는 문학과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여 그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이전 평론집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문학동네, 2000)에서도 진단한 것처럼, 디지털 문명으로의 전환은 인간과 생명의 의미를 위협하는 가혹한 신세계를 예비하고 있다. 이때 문학은, 시는 무엇인가. 저자는 “시의 힘으로 시인들 자신의 사회·문화적 지향점에 확신을 가지고 활동 반경을 넓혀갈 때 인류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과학기술 만능주의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천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한 문명사적 임무를 위해 저자는 문학 교육의 방법을 비롯해 한국시의 종교적 상상, 생태적 상상력의 문명사적 의미, 그리고 동아시아 자연시의 전통 등 폭넓은 방향에서 시의 나아갈 바를 모색하고 있다.
균형과 조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이어지는 2부와 3부는 현장비평적 성격이 강하다. 2부는 김명리 강은교 문정희 한분순 한영옥 최정례 이사라 등 여성 시인들의 시세계를 살핀 글을 모았고, 3부는 신경림에서 이산하에 이르기까지 오탁번, 오세영, 송수권, 김명인, 황지우, 이성복 등 우리 시단을 주도하는 시인들의 시세계를 탐색한 글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시인들의 다채로운 면모는 시의 현장을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읽어나가고 있는 저자의 애정을 확인하게 해주며, 이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의 목소리는 우리 시의 방향성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탐색을 보여준다.
특히 여성 시인들의 시를 다룬 2부에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나혜석의 시작(詩作)에 관한 연구가 덧붙은 것은 그 자체로 한국 여성시의 계보를 구성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며, 또한 김수영의 시를 부자유친이라는 동양사상의 전통에서 살피는 시각은 그에 대한 기존의 모더니즘 편향의 해석을 교정하는 의미 있는 연구이다.
이처럼 그의 비평은, 책머리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시피, 섣불리 서구의 이론을 추수하기보다는 내적 논리를 심도 있게 되새기며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하는 것들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것들을’ 통찰하려는 ‘균형과 조화의 미학’을 일관되게 추구해오고 있다. 저자가 웅변하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문학의 위의(威儀)가 무게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구의 비평이론을 원용한 혁신적인 명제를 내세웠다기보다는 현재의 쟁점들을 천착하고 이를 지속적인 논리로 해결하려 모색하였다. 서구에서 전파된 비평적 논리를 추수하려는 강한 지적 유혹 속에서도 필자는 나름대로 일관된, 비평적 논리를 찾으려 노력해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밖에서 빌려온 외적 충격도 중요하지만 안에서 발생된 내적 논리를 심도 있게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판단하였고,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하는 것들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것들을 통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필자 나름으로 말한다면 균형과 조화의 미학의 추구라고 할 수 있으며 문학과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화두로 이 책의 서두를 집약하고 싶다.
시의 미래가 있을까.
그렇다. 시의 미래가 없다면 인류의 미래도 없다.
―‘책머리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