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적인 미의식에서 끄집어낸
백자 같고 무명 저고리 같은 한국의 미!”
좋은 글은 세월을 무색케 한다. 세월이 흘러도 매번 신선한 자극을 준다. 주요 언론사 논설위원으로 필력을 날린 홍사중(1931-)이 ‘한국인의 미의식’을 탐구한 한 에세이집이 그렇다. 하지만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은 시중에서 사라졌고, 20년이 넘게 묻혀 있었다. 한 미술 계간지에 연재하면서 인기를 끌었던 이 에세이를 기억하는 독자들의 아쉬움이 컸다는 후문이다. 그 불우한 책이 새로운 글과 컬러 도판을 보충하여 개정 증보판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불상, 동양화, 정원, 문양, 고목기, 도예, 꽃병, 국밥 환경, 미술 등 우리의 전통 문화재와 생활문화, 물건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심층에 잠재해있는 미의식의 실체를 밝혀낸다. 이때 동서양은 물론 옛날과 오늘을 넘나드는 폭넓은 안목과 지식으로 아름다운을 보는 눈과 마음을 찾아준다. 지은이의 미의식에 관한 사유는 깊고도 정치하다.
동양에는 공통된 일이지만 특히 한국에는 예로부터 미학이 없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이란 몸으로 느끼는 것이지 머리로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었다. 합리적인 논리를 초월한 곳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미의식이었다. 미학이 발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이런 미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아름다움의 유전자는 무엇인지 등의 자문(自問)하며 우리 정서와 생활 방식, 역사 속에서 중국, 일본, 서양과 구분되는 우리만의 독특한 미의식을 찾아간다.
지금은, 그 옛날에 즐겨 입었던 흰색 무명저고리는 민속박물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또 우리는 초고속 인터넷이 상용화된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정서를 도금하고 있는 미의식은 전통에 기초한 것이어서, 아름다움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이 디지털 시대에 ‘다시 찾은 한국인의 미의식’은 현재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으로 안내한다. 그것은 ‘우리’를 찾고, ‘나’를 찾는 길이다.
마음으로 본다는 것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에서는 ‘본다는 것’에 대한 우리와 서양의 관점의 차이을 지적한다. 그 차이는 ‘불상의 눈’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를 돕는다.
“(불상의) 잠자듯이 감긴 눈은 모든 것의 중핵을 꿰뚫어 보고, 모든 유한한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개별적인 것과 포괄적인 것, 연속적인 것과 단절적인 것, 이렇게 자연의 모든 것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면을 아울러 보고 있는 불상의 눈.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전통적인 사유가 이상으로 삼아오던 것이라고 할까. (……) 불상의 명상하는 눈, 그리고 그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가에 감돌고 있는 깊이 모를 정밀(靜謐), 분명 그것은 불교의 세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한국적인 발상 형식의 한 극한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상은 가까운 것과 먼 것, 작은 것과 큰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보는 것은 이fms바 심안(心眼)을 통해서 보는 ‘관(觀)’이다.”
이러한 ‘관’은 보일 듯 말듯 인물을 그려 넣는 한국화의 풍경화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는 도한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 인간을 뛰어넘는 것들을 통해서만 인간을 긍정하려는” 한국적인 불상 형식을 만들었다.
또한 두루마리를 펼쳐가며 보게끔 그리는 한국화에 담긴 시간성에 대해 「소상팔경도」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을 통해 반추한다. 황금분할이나 8등신 등의 이상적 아름다움에 대한 규칙을 찾아냈던 서양의 논리와 같은 한국화에서의 이상적 아름다움의 원리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진정한 자연스러움의 멋
2부에서는 한국의 멋과 자연스러움을 우선으로 삼았던 우리의 미의식과 색채감각을 다룬다.
옛사람들은 ‘풍류’를 즐기며 사는 것을 큰 멋으로 알았다. 풍류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질되고 전해져왔는지, 변질된 ‘풍류’와 진정한 우리의 ‘멋’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을 탐문한다. 또한 ‘맛’이라는 말이 국물을 ‘마시다’에서 나왔다는 점을 들며, 국밥과 같은 음식에서 우리의 미의식을 찾아낸다.
“국밥을 즐겨 먹던 옛 한국인이 지나치게 깔끔하게 다져나가는 것을 ‘좀스럽다’ 하여 참멋이 아니라 겉멋으로 따돌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게 한국인 본래의 성정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한국인은 미완의 미에서 멋을 찾았다. 한국 옛 화가들의 작품들 거의 모두가 그리다 만 듯한 데가 있는 것도 단순히 사실성이 부족하거나 솜씨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디테일에서 대범한 맛을 찾는 독특한 미의식 탓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눈요기를 위한 음식보다는 냄새가 있는 음식을 즐겼던 우리 문화에서 “눈요기를 위한 색깔을 애써 죽이는 것을 멋으로 알았다”며, 철사보다 진사 도자기가 귀했던 도자기 문화나 동양권에서도 유독 여백을 많이 남겼던 한국화의 이유로 설명한다.
꽃꽂이가 발달한 일본과 달리 꽃병조차 없던 우리 생활상에서도 지은이는 진정한 자연스러움을 멋으로 삼은 우리 미의식을 찾는다. 자연을 그대로 만들어 방 안으로 옮겨놓고자 했던 일본과 달리 옛 한국인은 자연을 다시 자연처럼 만드는 어떠한 인공성도 허용할 수 없어, 자연 그대로 놔두는 것이 최상이라 여겼다. 가장 자연스러운 멋이란 자연 그 자체이지, 자연의 닮음 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 백색에 대한 세계 각국의 의식의 차이를 말하며 한국의 백색에 대한 색채감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흰색 저고리나 백자가 발달하고 그 멋을 즐길 줄 알았던 우리 미의식에 대한 서술이다.
3부에서도 이 자연스러움의 멋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의 방치레나 「이풍춘전」의 기생 추월의 방치레 등 옛 한국인의 방치레에 대한 글을 예로 들며, 조선시대의 방치레에서 가장 중요했던 ‘용즉미(用卽美)’라는 실용적인 미의식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그러한 미의식 속에서 순박하고 인간적인 따스함과 자유스러움이 나왔다고 밝힌다. 이런 자연스러움에 대한 미의식은 정원이나 문양, 가구 등에도 중심이 되었음을 서술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한국인의 미의식의 궤적을 좇은 3부까지와는 달리, 서구화되어가는 근대 이후의 우리네 예술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계속 이어져오는 면도 있지만 진정성을 잃어가는 우리의 현재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 가난 속에서도 진정한 예술성을 잃지 않았던 진정한 예술가의 초상과 달리 잘못된 관습에 따라 변질되어가는 예술가들과 미술시장에 대해 질책한다. 또한 빠르게 변하는 도시와 아파트 등의 주거환경이 어떤 시각적 불편을 끼치게 변모해 가는지 언급하고 있다. 20여 년 전의 글임에도 지금의 도시와 환경에 대입시켜도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그동안 그의 따끔한 지적이 개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록으로 우리 문화계를 들여다본 칼럼을 수록하여, 이 책의 의미를 두텁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