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시리즈
한국 문학의 눈부신 결산
소설집 9종, 앤솔러지 시집 1종 출간
이 책은 경기문화재단 주관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 창작지원금을 지원, 그들의 작품을 시리즈로 출간하는 기획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올해 출간되는 시리즈는 9명의 소설가들이 참여한 소설집 9권, 13명의 시인들의 신작시를 묶은 앤솔러지 시집 1권으로 구성돼 있다. 온몸으로 건져 올린 발칙하고 싱싱한 언어들, 시대를 감싸 안는 빛나는 감수성이 오늘의 소설, 시의 면면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올 한 해 우리 문학의 눈부신 결산 중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우연이었다―「세리의 크레이터」
『세리의 크레이터』는 우연의 연쇄를 그들의 만남이라는 결과의 원인으로 이해해보려는 연인들의 이야기이다. 친구의 전 여자친구 세리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그녀의 오피스텔에 들어가 살게 된 ‘나’는, 한 달쯤 됐을 무렵 세리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배 속의 그 아이가 친구와의 사이에서 잉태된 아이임을 확인한 두 사람은 곤혹스러운 순간을 맞닥뜨린다.
이제 세리는 어느 정도 결심이 선 모습이었다.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운석이 떨어지는 걸 보고서 엄마는 생각을 바꾼 거였어.”
나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세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너도 운석이라도 봤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한번 봐야겠어. (중략) 운석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대신 운석이 떨어진 곳이라도 가보려고.” _14쪽
세리는 미혼모였던 어머니가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진 것을 보고서 자신을 낳기로 결심했음을 거듭 상기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나’는 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세리의 말에 오만 년 전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던 초계분지로 함께 향한다.
세리는 운석 대부분이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대에서 온다고 알려주었다. 소행성대는 수많은 소행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우연히 목성의 인력에 이끌려 소행성대를 이탈한 뒤, 다시 태양의 인력에 이끌려 태양을 향해 날아오다가 또다시 지구의 인력에 우연히 이끌려 지구로 떨어져야 운석이 된다는 거였다. 쉽게 말해 소행성이 목성, 태양, 지구 순으로 인력에 이끌려 떨어져야 한다는 얘기였다. _22~23쪽
하지만 “세리, 오와 세리 사이에서 낳은 아이, 그리고 내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나’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 그러니 세리에게는 이 여행이 자신의 결심을 ‘나’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차라리 전염시키기 위한 여정의 의미를 띤다. 다시 말해 그녀가 바라는 바는 ‘자신, 오와 자기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그 가족 안으로 ‘나’가 기꺼이 걸어 들어오는 것이고, 그러한 가족의 탄생을 맞이하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더도 덜도 말고 단 한 번의 결정적 순간이다. 결심을 해야 할 당사자가 바뀌는 것이다.
곧이어 나는 말 그대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긴장한 탓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점차 적응되는 듯했다. 비행사 역시 나를 배려하며 비행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비행사가 비행 방향을 천천히 초계분지 쪽으로 틀었다. 초계분지는 대암산 정상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아마도 세리는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어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것 같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날 운석을 보고 생각을 바꿨던 것처럼, 나도 그러기를 바라면서. _34쪽
우연은 필연이, 필연은 기적이 될 수 있을까. 배 속의 아이라는 우연과 맞닥뜨린 두 연인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온전한 타인과 마주하기―「옆집에 행크가 산다」
「옆집에 행크가 산다」는 주인공 ‘나’가 낯선 이와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는 어쩌면 ‘행크’다. ‘나’와 아내 민정이 한때 열광했던 ‘링 위의 야수’. 그 시절 ‘나’가 아내와 함께 관전했던 시합에서 어깨 부상을 입고도 버티다 결국 판정패를 받아들고,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난 상태로 일 년 만에 다시 오른 링에서 기대 이하의 모습으로 광대가 되어버렸으며, 그러고도 시답잖은 시합들을 수십 회나 이어가다 수순처럼 은퇴한 비운의 파이터. 그런 행크가 스물네 평 아파트 옆집으로 이사를 와서, 플라스틱과 일반 쓰레기가 잔뜩 실린 카트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옆집 남자가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을 해도 행크라는 생각이 들었고,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행크의 이미지를 찾아보았고, 결국 그가 행크라는 걸 의심치 않게 되었다. _40쪽
소설의 화자인 ‘나’는 내내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옆집 남자가 행크일 리 없다는 생각과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 사이를 바삐 오락가락한다. 어찌 보면 해프닝에 불과할 이 이야기는, 그러나 ‘나’와 민정이 사는 그곳에 공공임대아파트 건설이 예정되어 있다는 맥락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그리하여 민정은 그가 행크든 아니든 함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흑인이잖아. 우리 집값 떨어져.” _50쪽
민정은 그렇게 말한 뒤에도 속에 있는 무언가가 풀리지 않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민정이 한 말은 모두 옳았다. 그럼에도 나는 민정이 나에게 화를 내고 있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_64~65쪽
‘우리’의 범주에 포함시킬 누군가를 직접 택하겠다는, 구별 짓기를 통한 배제를 꿈꾸는 욕망이 타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요컨대 ‘나’의 환대는 ‘내가 아는’ 그를 향해서만, 그를 ‘내가 아는’ 만큼만 조건부로 작동해왔던 것이다. 행크를 닮았지만, 행크가 아닐 수도 있는 이 옆집 남자를 ‘나’는 어떻게 마주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