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비정한 원(Circle)의 우주
그것이 그대로 삶이고 죽음이고 사랑인 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또다시 출발하는 무한의 사유-
냉철한 이성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만들어낸 황홀한 시적 모험!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은 시인 함기석의 신작 시집 『오렌지 기하학』이 출간되었다. 전작 『뽈랑공원』 이후 4년 만에 나온 이번 시집은 따로 부가 나뉘지 않은 총 67편의 시가 엮였다. 한국 현대시의 최전선에서, 수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언어적 실험을 감행하는 함기석의 시는 독자들에게 그리 친절한 편이 되진 못한다. 하지만 그 시세계에 발을 담그면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우주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문학평론가이자 고려대학교 불문과 조재룡 교수가 그의 시세계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설을 써주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오렌지 기하학』 속으로 들어가본다.
문자와 의미, 존재와 무한, 말의 한계와 가능성, 그 소멸의 과정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진지하고도 고통스런 성찰을 전개해온 시인 함기석은 이번 시집에서도 정밀한 계산과 치밀한 검증을 바탕으로 미지의 세계를 펼쳐놓는다. 언어가 가진 통념과 속성, 그리고 의미의 생성 경로를 낱낱이 파헤치고 그 허점을 짚어내는 그의 시는 온갖 통념을 거부하는 그 짧은 순간을 수학적 사유에 의지해 적시한다. 의미에서 무한으로, 무한에서 무로 치닫는 이러한 언어적 실험을 통해 독자들은 시의 본령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무한을 사유하고, 거기서 무에 이르는 길을 쟁취해내는 데 바쳐지는 시. 그것은 시집 전반에서 복잡한 수학적 개념들을 연동시키고 여기에 온갖 언어 실험을 포개놓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글과 사유, 시 창작의 과정을 수학과 결부시켜 제반의 물음을 확장시켜나가는 일련의 작업은 그러나 “피로 물든 백지와 함께 나를 찾아온다”(「오렌지 기하학」). 불가사의한 인간의 운명이나 우주와 시간과 같은 개념을 수학적 사유를 빌려 시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시인의 작업은 왜 인식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모험인가. 함기석은 없음을 만들어가는 과정(무위)을 시 전반에서 녹여내고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삶의 희로애락과 착란 속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과 그 과정을 “발음될 수 없는 낱말”(「제로 행성」)로 담아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함기석에게 시는 죽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공리를 만들어내는 수학공식과도 같다. 무한을 사고하고, 그 사고의 구체적인 절차를 언어의 속성에 결부시켜 녹여내고, 세상을 그 주물 안에 담아보고자 하는 것. 죽음에 이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인은 그 과정을 드러내고, 죽음을 넘어 무한을 사유한다.
애초에 없었던 것, 없다고 말해온 것, 언어나 문자로는 가닿을 수 없는 것들이 왜 존재하며,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고, 그 궁금증을 파고들어, 새로운 시적 세계를 개척한 함기석은 그 과정에서, 발견하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무한수렴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끝이 없는 무한의 행렬과 결국에는 무한하게 지워지는 세상. 바로 이렇듯 무한으로의 거대한 순환이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제로(0)인” 너와 내가 결국 “더 큰 제로(0)로 되돌아가는” 이 “아름답고 비정한 원(Circle)의 우주"에서, ”그것이 그대로 삶이고 죽음이고 사랑인 시“(「시인의 말」)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오렌지 기하학』이 선사한다.
언어의 극한, 언어가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가능성을 한껏 밀어붙여, 언어와 비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 무한의 영역마저 파고들어 언어의 깃발을 꽂아놓은 시인이 있다. 그리하여 비로소 늘 생성 중인 상태의 시적 언어의 모험이 착수되었다. 삶의, 세계의, 우주의 공백을 채워나가면서, 공백을 만들기 위해 삶에, 세계에, 우주에 덧씌워진 관념들을 하나씩 탈색해내면서 힘겹게 무위의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시인을 따라 그 황홀한 모험을 함께할 독자들을 기다린다.
● 시인의 말
코흐곡선 해안을 걷고 있다
벼랑 끝 하늘로 물고기들은 헤엄쳐 오르고
죽은 자들의 숨이고 육체였던 저 투명한 대기 속에서
빛이 제 눈을 검게 태우고 있다
제로(0)인 너와
제로(0)인 내가 만나
무한(∞)이 되었다가 더 큰 제로(0)로 되돌아가는
아름답고 비정한 원(Circle)의 우주
그것이 그대로 삶이고 죽음이고 사랑인 시
세계는
제로(0)와 무한(∞) 사이에서 녹고 있는 눈사람(8)
자신의 부재를 자신의 몸 전체로 목격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동자부터 녹아내리는
진행형 물질
우린, 죽음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2012년 6월
함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