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들』은 20세기를 통째로 살며 기록하고, 2009년 99세의 나이로 작고한 윌리 로니스가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사진 인생을 통틀어 가장 붙잡고 싶은 우연한 순간들”을 모은 것으로, 노작가의 사진 기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삶의 마지막 기억이 이토록 따스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안겨주었던 책이다.
이번 개정판은 윌리 로니스의 사진이 전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에 부합하는 모양새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 <어린 파리지앵>은 한때 전 세계 빵집이란 빵집엔 다 걸려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사진 중 하나인 <퐁데자르의 연인> 역시 사진 엽서로, 퍼즐로, 티셔츠로, 포스터로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그런 작가의 책 역시 더 많은 독자들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장용 양장본 대신 보급형으로 다시 만들었다.
파리의 20세기를 통째로 기록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저 평범하게 다가왔다가 사라져가는 일상들 속에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시대는 변해간다. 어린 시절 학교 운동회에서 찍은 사진, 중학교 까까머리 시절의 수학여행 사진과 졸업사진. 결혼사진과 아이들과 함께 찍은 동물원에서의 사진들은 이제 먼지 자욱하게 내려앉은 앨범 속에서 잠자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은 앞만 바라보고 뛰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것이 당연시될 정도로. 과거는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며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 미래의 생활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그 어떤 것들에 매달려 쉼 없이 달려만 간다. 프랑스의 휴머니스트 사진작가 군단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윌리 로니스는 이처럼 숨차게 달려가고 있는 우리에게 잠깐 쉬었다 가라고 말한다.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앞날보다 무엇인가가 확실하게 있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 번 확인해보라 말하는 듯하다.
옛것은 낡고 불편하고, 어딘가 세련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허물고 새롭고 빠르면서 날렵한 첨단의 시대로 무장해야 한다는 현대인들의 강박을 이 사진작가는 한편으로 아쉬워하면서 사진을 남겼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금처럼 변화의 물결이 거세던 1950년대 파리를 회상한다. 첨단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퐁피두센터가 우뚝 서 있다. 낡은 건물은 사라지고 신식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는 프랑스의 모습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몽타주하게 된다. 그는 변화에 쫓기지 않고, 변화를 즐겼던 시절의 모습과 또 이 즐거운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기억한다.
평범함을 감동으로 만드는 윌리 로니스의 기적
“내 인생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커다란 기쁨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기쁨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윌리 로니스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피사체를 긴장시키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에 했던 프랑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삶에 움직인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거니는 거리를 좋아한다. 나는 나를 숨기지 않지만, 또 아무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사진가로서 평생 지켜온 원칙이다.
불꽃놀이의 화려함을 좇거나, 퓰리처상을 받을 만한 의미심장한 사건 현장들은 아니지만 그가 포착한 순간은 햇살처럼 문득 다가오는 감동이다.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우연과의 거대한 공모가 있다. 그런 것은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 내가 ´의외의 기쁨´이라 명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뒤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늘 준비해야 한다.(본문 90쪽)”는 발언에서는 보통 사진작가들이 자신을 사냥꾼(shooter)이라 부르는 것과는 조금 다른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박물관에서 지루하게 설명을 듣는 아이의 몸짓에서(본문 86쪽), 커다란 바게트 빵을 들고 행복해 하는 아이의 표정(본문 171쪽)에서 우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행복은 이렇듯 작은 순간에도 존재했다고, 늘 커다란 미래의 행복만을 좇는 우리에게 그의 사진은 큰 깨달음을 안겨준다.
사진작가의 마지막 선택, 그날들
“나는 모든 내 사진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내 사진들은 내 인생의 조각천이다. 몇 해가 지나서도 내 사진들은 서로 자기들끼리 신호를 주고받는다. 서로 화답하고, 모여들며, 비밀을 엮어간다. 하나의 생에, 하나의 장면에 모든 것이 있고, 결국 이 모든 것은 작은 것들의 별자리로 귀결된다.”라고 했던 윌리 로니스는 자신만의 은밀한 별자리를 이 책에 숨겨 놓았다.
아내 마리안과의 행복했던 신혼시절, 아이들과의 휴가, 그리고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들까지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윌리 로니스는 아내의 치매와 지금은 관광명소가 된 퐁피두센터의 환기구를 ‘그 기괴한 입’이라 부를 정도로 매 순간의 변화에 당황스러웠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의 치매를 받아들였듯, 그는 흐르는 시간을 받아들인다. 이 책은 윌리 로니스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인 2006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그의 마지막 회고 사진에세이집이다. 그는 1934년 노동자 시위 현장, 38년 시트로앵 자벨 자동차 회사 파업 현장, 제2차 세계대전 전쟁포로 귀환 등, 수많은 사건 현장에 불려갔고 자진해서 달려가기도 했지만, 진짜 남기고 싶었던 사진은 이런 것들이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마지막에 선택한 사진들 속에 특종은 없다. 있다면, 그와 같은 시절을 살았던 사진 속 이름 모를 사람들의 그 시절 그날들의 특종이, 그리고 윌리 로니스라는 한 인간의 역사가 담겨 있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