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오후,
읽기와 쓰기에 대한 기품 있는 소회
어느덧 창밖이 어두워졌습니다
대학을 나와 한 직장에서 명함적 존재로 30여 년을 살아온 중년의 저자가, 일상의 먹고사는 언저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산책하듯 찬찬히 써내려간 글을 모았다. 신문지에 싼 마른 국수다발을 옆구리에 끼고는 자기도 모르게 국수를 줄줄 흘리며 집으로 향했던 어린 시절 국수 심부름 이야기, 중년이 되어 쓰러진 친구나 암 투병을 하는 친구와의 술자리, 부음을 듣고 가는 조문 길 풍경에서 마주친 생의 황망함, 은퇴 후의 미래 등 저자의 경험을 따뜻하게 담고 있다. 읽다보면 어느새 소소한 일상과 작은 이야기들이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저자는 동양고전과 현대소설, 불교, 경제서적 등 분야에 매이지 않는 독서와 글쓰기 습관으로 기품 있는 에세이를 선사한다. 치매 노인과 그 가족을 이야기하는 글에서는 김훈의 소설을, 진정한 희망의 의미를 묻는 글에서는 유레크 베커의 소설을, 투명사회가 인간이 진정 원하는 삶의 조건인지 자문하면서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을, 길흉화복의 서두에는 백거이의 시를, 살아가면서 얻는 상처로 삶의 완형을 이루는 글에서는 이청준의 산문을 등장시킨다. 이 밖에 추억에 대한 소회와 세설의 깊이에서도 저자의 독서이력을 엿볼 수 있다.
고생이 되든 어떻든 우리는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어느 늦은 오후의 성찰’은 어느덧 삶의 중반을 넘어선 시간, 중년 남성의 내밀한 심상을 다루고 있다. 쓰러져 투병중인 친구, 가까운 친지를 떠나보내면서 갔던 화장장의 분위기, 갑을관계, 명함적 존재로 살아가는 삶의 정체성과 고독 등을 담았다.
2부 ‘먹고사는 언저리에서’는 현실세계의 피로감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등장한다. 먹고사는 일의 팍팍함과 세상에서 밀려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그 강박에 길들여지는 세월이 지난날의 그리운 것들을 불러낸다. 값싸고 푸짐한 국수를 먹으면서는 40년 전 흑백필름 속으로 들어간다. 제분공장에서 월급 대신 밀가루를 받아온 먼 친척 덕분에 자주 먹었던 국수와 국수죽 이야기, 연말정산을 하면서 가진, 앞으로도 계속 쥐뿔도 없을 테니 속 편하게라도 살자는 마음 약한 다짐. 생업의 일환으로 대필을 했던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옛 모습을 떠올리는 대목은 사뭇 감동적이다.
3부 ‘깨달음이 불편할 때’는 세상사에 대한 따스한 시각을 담았다. 더는 시장논리와 글로벌 추세를 핑계대지 말자면서, 고용 없는 성장은 성장 없는 고용보다 나쁘고, 성장 없이 분배 없다고 말하지 말고 분배 없이 성장 없다고 말하자고 주장한다. 또한 대통령부터 대학총장, 종교계에까지 나타나는 CEO 열풍에 대해서는 효율성과 경쟁과 이윤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 조직과, 정의와 평등과 사랑의 가치를 중시해야 할 조직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효율보다 포용이, 성장보다 환경이, 신속함보다 느림이 더 중요한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