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이상 서른 미만 여자를 위한 ‘감정 교육서’ 같은 연애소설 열두 편
간사이 사투리 연애소설로 유명한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들 가운데 최고의 사랑을 받은 단편을 엄선한 『고독한 밤의 코코아』가 출간됐다. 다나베 세이코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삼십대 여자들의 연애 담화를 신랄한 필치로 그린 『서른 넘어 함박눈』으로 올봄 또다시 국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독한 밤의 코코아』는 2010년 복간 이후 일본에서 또 한 차례 다나베 신드롬을 일으키며 80만 독자의 선택을 받은 책이다. 삼십 년도 전에 쓰인 이 소설들이 그토록 사랑받는 것은 특유의 구성진 유머와 단순명쾌한 서사, 감각적인 문체와 더불어 인간과 삶에 대한 다나베 세이코만의 탁월한 묘사와 관조 덕분일 것이다.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을 통해 여자들은 연대하고 공명한다. 무겁지 않은 스토리로 무한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글 몇 줄로 생의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를 만들어가는 솜씨,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철렁할 만큼 인간 심리를 꿰뚫는 예리함은 이제 다나베 세이코 하면 떠오르는 특별한 아우라가 되어 독자들을 언제나 기대에 부풀게 만든다.
서른 넘어 내리는 눈은 차분하고,
스물 넘은 나의 밤은 언니의 밤보다 고독하다
이 책에는 ‘고독한 밤의 코코아’라는 제목을 단 단편이 등장하지 않는다. 열두 개의 단편은 각각의 주인공들이 보내는 각기 다른 ‘고독한 밤’의 기록들이고, 그 밤의 이야기들은 달콤하지만 뒷맛은 씁쓸한 ‘코코아’의 향기를 품고 있다. 열두 단편의 이미지를 모아 외연을 확장한 이 책의 제목은 아마도 고독한 밤을 보내는 청춘의 그녀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따뜻한 위로일 것이다.
와타야 리사는 그녀들의 밤을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코코아를 마시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고, “나는 뭘 위해 살고 있나, 그는 지금 어디서 뭘 할까”를 떠올리는 공간이며, 달콤 쌉쌀하게 입안에 감도는 그 맛이 “인생의 맛”임을 깨닫는 순간이라 말했다.
『서른 넘어 함박눈』이 삼십대 여자들의 로맨스를 그렸다면 『고독한 밤의 코코아』는 아직 많이 어설픈 이십대 여자들의 로맨스를 그린다. 본격적으로 연애다운 연애에 도전하는 ‘스물 넘은 여자들’의 연애는 뭘 좀 알게 된 ‘서른 넘은 언니들’의 연애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이십대의 연애는 삶의 공기가 뒤바뀔 정도로 심각할 때가 많다. 연애에 대한 몰입도도 언니들보다 훨씬 높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속에서 홀로 유영한다. 그렇게 주구장창 꽂혀 있다가 어느새 둘러보면 그는 가버리고 혼자 남겨져 있다.
말랑한 심장으로 뛰어든 그녀를 기다리는 건 반성의 밤?
심장은 꼬독꼬독해지고 밤은 더 고독해진다
인생의 쓴맛, 연애의 쓴맛을 모르고 말랑한 심장으로 연애의 바다에 뛰어든 이십대의 그녀는 ‘그’라는 꿈에 빠져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아닌 척 새침 떨면서도 뒤에서는 두근두근 야단법석이다. 사랑이라는 마법에 걸리면 여자의 눈에는 시시껄렁한 남자도 페로몬 가득 풍기는 매력남으로, 빈대같이 폐만 끼치는 남자도 다정다감한 남자로, 바람둥이도 그저 외로움 잘 타는 남자로, 감자같이 못생긴 남자도 우수 어린 남자로 변신한다.
어디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다. 볼 때마다 좋아진다.
“그 남자, 별명이 감자야.”
“알아.”
“그 감자가 좋다고? 어머!” _「공기 통조림」에서
그러나 앞으로가 태산이다. 사귀기 시작하면 그저 행복할 줄 알았는데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지고 매사가 호락호락하게 굴러가질 않는다. 생각은 많고 경험은 없고 표현력 떨어지고 자기감정조차 아리송하니 문제가 터질 때마다 첩첩수심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곁에 있어 좋기만 했던 남자를 얼떨결에 밀어내버리고(「행복은 돌이 되었다」), 자기 생각만 하다가 남자에게 황당한 어깃장을 놓고(「충직한 연인」), 가끔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숨어버리는(「세상엔 좋은 남자가 가득할 거야」) 초보다운 우를 범한다
그는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_「충직한 연인」에서
남녀의 차이에 대해선 맹꽁이 수준이다. “나는 여자고 그는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내가 이러니까 그도 이럴 거”라고 믿고 “컨트롤하려” 들고(「너무 늦은 거야?」), 남자가 괜찮다니까 정말 괜찮은 줄 알고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리기도 한다(「부르르 씨」). 그러고는 파투가 난 다음에야 뒤늦게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찾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연애의 실패가 거듭될수록 그녀들의 밤은 더 고독해지고, 심장은 꼬독꼬독해진다.
연애는 진짜 재밌지만 고달파!
소녀의 로맨티시즘과 성인의 리얼리즘이 공존하는 다나베 소설의 진수
독특한 유머와 해학, 연애와 현실의 거리에 대한 날선 통찰, 이야기가 끝나면 ‘모두 그렇구나’ 하는 보너스 같은 안도감까지 선사하는 다나베의 소설은 극적이기보다 일상의 풍경처럼 잔잔하고 유머러스하게 전개되지만 이 책에 실린 「개양귀비 사랑」이나 「봄을 알리는 새」 같은 단편은 그 어떤 애달픈 사랑의 글보다 극적으로 소멸의 허무와, 성인의 사랑을 강렬하게 형상화한다. 이렇듯 소녀의 로맨티시즘과 성인의 리얼리즘이 공존하는 다나베 세이코의 연애소설은 노련한 여가수가 관객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부르는 노랫가락과 같다. 이 가수는 때로 장난기 가득한 은밀한 가사로 듣는 이의 얼굴을 붉히게 하고, 절절한 멜로디로 가슴을 무너뜨렸다가 뜻밖의 제스처로 긴장감을 유발하면서 경탄스러운 무대를 만들어나간다. 관객은 사랑을 노래하는 작지만 폭발적인 이 무대를 통해 세상의 관계를 되새김하고 다양한 조화로 가득찬 삶 속에 떠오르는 ‘연애’의 소소하지만 알짜의 재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