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중앙은행의 출현은 ´소리 없는 혁명´
신비주의를 고수하며 ‘비밀의 수도원’ 같았던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1990년대 이후 개방성과 투명성을 바탕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보다 더 투명하고, 보다 더 분명하게 통화정책을 일반 대중과 시장에 설명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은행은 비밀주의를 견지했지만 통화정책의 수요자인 일반 대중과 시장은 중앙은행의 행태를 예측하려 했다. 이런 상황은 일반 대중의 인플레이션 기대를 높이고, 결국 실제 인플레이션도 높아지게 만들었다. 오히려 현실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기대’가 ‘현실’의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린 것이다. 결국 중앙은행이 ‘장기적인 물가 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반 대중과 시장의 기대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때문에 일반 대중의 기대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현대적 중앙은행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핵심적인 매개체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로금리가 불러온 중앙은행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혁신
2008년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었다. 금융시장에는 돈이 돌지 않았고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수 없는 상태인 ‘제로금리’ 상황에 빠졌다. 기준금리를 조정할 수 없는 상황이 오자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혁신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들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평온했던 시기보다 위기의 시기에 중앙은행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미국 연준 등은 중앙은행이 채권을 매입해서 돈을 푸는 ‘양적완화’와 미리 정책금리 전망을 명확하게 가르쳐줘 일반 대중과 시장의 기대를 바꾸는 것을 추구하는 ‘포워드 가이던스’를 도입했다. 당분간 초저금리를 유지하겠다는 발표는, 그 기간이 2013년 중반, 2014년 말, 2015년 중반 등으로 멀어졌다. 급기야는 실업률이 6.5% 아래로 떨어지기 전까지, 기대인플레이션이 2.5%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제로금리를 유지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 같은 선언은 금리 인하와 마찬가지의 신호를 시장에 보냈다. 주가가 상승하고 부동산 가격이 꿈틀대게 됐다. 미국의 2013년 경제성장률이 2% 정도에 머물 것으로 예상되고 있음에도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은 이렇게 기대를 조절하고자하는 중앙은행의 의도가 미디어 등에 제대로 반영이 되면서 ‘기대경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은행의 바람직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1990년대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점점 더 분명하고 투명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고 한국은행도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바람직한 한국은행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첫째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단순한 ‘정보 공개’가 아니라 일반 대중과 시장에 한은의 통화정책이 잘 반영되는 ‘기대를 형성’ 하는 데 방점을 둬야 한다. 둘째, 분명하고 정확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모호한 화법을 피하는 동시에 한국은행의 말이 ‘불변의 법칙’이 돼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셋째, 일반 대중과 시장의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과거 사례를 분석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명히 하고, 충격 효과를 최소화해야 한다. 한번 구축된 신뢰를 쉽게 허물지 말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넷째, 통화정책 신호에 대한 잡음을 최소화해야 한다. 한국은행은 일반 대중과 시장에 보내는 통화정책 신호가 엇갈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표가 명확하고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국회, 정부와의 관계도 매끄럽게 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섯째, 신호를 반복해서 보내야 한다. 정보의 확산을 위해 신호를 계속 보내고, 청중은 달라도 메시지는 일관성 있게 전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중앙은행이 통화 완화적인 정책을 펴든 통화 긴축적인 정책을 펴든 통화정책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고 전한다. 일반 대중과 시장이 중앙은행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뢰를 갖고 있다면 정책 불확실성에서 오는 시장의 불안감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책속에서
"ECB는 유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나를 믿으십시오. 충분한 조치를 할 것입니다." ECB 관계자들은 그날 드라기가 솔직담백한 연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지만, 이렇게 단호하고 분명한 말을 할지는 알지 못했다. 드라기의 한마디는 과거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사용하던 모호한 문장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 제1장 어떻게 통화정책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이 핵심적인 도구가 되었나? (P. 25)
1987년 취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열린 의회의 청문회에서 그린스펀 전 의장이 던졌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얼마나 중앙은행 총재들이 ´불명료함에 경도됐었는지 알 수 있게끔 한다. "중앙은행에 합류한 이후로 저는 ´(대중 앞에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라(mumble with great incoherence)´고 배워왔습니다. 만약 내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지나치게 명료해서 알아들을 수 있다면, 내가 한 말을 여러분이 잘못 알아들은 게 틀림없습니다."
- 제2장 글로벌 금융위기 후 중앙은행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변화 (P. 65)
통화정책의 패러다임이 점차 공개주의로 바뀌면서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확보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시장에 충격을 주는 방식´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불확실성을 줄이고, 시장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이 우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 제3장 금통위의 금리결정 신호가 통화정책의 기대경로에 미치는 영향 (P. 153)
1990년대 이후 효과적인 통화정책 수단에 대한 연구 결과들은 커뮤니케이션이 중앙은행의 정책 수단 중에서 중요하고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는 증거들을 밝혀내고 있다. 중앙은행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앨런 블라인더 교수 등의 광범위한 서베이 논문에 따르면 최근 연구자들은 중앙은행의 커뮤니케이션이 금융시장을 움직이고, 통화정책의 예측가능성을 강화하고, 잠재적으로 중앙은행의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결과를 내놓고 있다.
- 제4장 중앙은행의 커뮤니케이션과 물가 기대 (P. 162)
우리나라에서 금통위원들은 침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통위 회의를 통해서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했다면 수시로 강연과 기자 간담회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경제를 보는 눈이 한 가지만 있을 수는 없다. 금통위가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밝히는 총재의 한마디가 현재 마치 금통위를 대표하는 듯이 돼 있지만, 총재 한마디만이 ´금과옥조´가 된다면 통화정책의 유연성이 없어질 우려가 있다.
- 제5장 한국은행의 바람직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전략 (P.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