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세기 브이시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림자 추격전
통합정부 자치특별시 F구. 브이시티 최대의 범죄다발 구역이자 게토인 소돔엔 없는 게 없다.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안 되는 것도 없다. 단돈 10달러만 내면 안면 피부를 교체해 원하는 얼굴을 가질 수 있고, 남의 영혼을 이식하면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다. 도시는 완벽하게 통제된 시스템에 따라 굴러가지만, 동시에 그 시스템 밖에선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찰에게 의뢰하기 껄끄러운 사건들을 대신 처리해주는 해결사, 즉 나 같은 ‘체이서’를 필요로 한다.
트라이톤 사(社)에서 생산된 6세대 안드로이드 체이서인 ‘나’는 공장에서 출고된 지 이제 겨우 4년 남짓이지만, 안드로이드의 짧은 수명으로 인해 벌써부터 망막박리가 진행되고 있다. 안구를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은 10만 달러. 그래서 나는 의뢰가 들어오는 사건은 무조건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해결해준다.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더 오래 존재하기 위해.
첫 번째 의뢰인 예언자: “미래는 그것을 아는 자의 것이 아니라 모르는 자의 것이다”
<프레드릭 & 제임슨 뇌신경 연구소 부설 정신병원>에서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중년 흑인 남성, 십대 백인 소년, 동양계 노인, 셋이 하루에 한 명씩 차례로 죽었다. 각기 다른 연령대의 인종 표본을 수집한 듯 보이는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살아 있는 시체 혹은 영혼을 빼앗긴 좀비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사건엔 사인도 없고, 범행 도구도 없고, 용의자도 없다.
나에게 사건의 해결을 의뢰한 것은 정신병원 측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수용된 망상증 환자 중 한 명으로, 이들의 죽음을 정확히 예언한 노파다. 예언자라 불리는 그녀는 나에게 말한다. 어떤 엄청난 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으며, 그것을 당신이 막아야 한다고. 그리고 노파는 자신의 죽음과 나의 미래를 예언한다.
두 번째 의뢰인 섀도브레이커: “프랭크를 찾아주세요”
병원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내 사무실 문을 두드린 것은 반쯤 넋이 나간 소년이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실종되었으며, 그것이 프랭크 C. 밀러라는 자와 관계되어 있으므로, 프랭크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소돔의 신분증 위조범, 일명 ‘섀도브레이커’였다. 그는 극소량의 DNA 샘플만 가지고도 거의 완벽한 가짜 신분증을 만드는 기술의 보유자로 유명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랭크라는 남자가 찾아와 DNA 블루프린트 타입 아이디를 의뢰했고, 그 뒤로 노인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하더니 결국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홀로 남겨진 소년은 노인에게 배운 실력으로 섀도브레이커로 일했다. 그리고 바로 사흘 전, 또다시 프랭크가 찾아와 소년에게 DNA 블루프린트 타입 신분증을 만들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대체 노인은 어디로 사라졌으며, 프랭크는 왜 소년을 다시 찾아온 것일까? 내가 의문을 품은 순간, 사무실 창밖으로 수상쩍은 검정색 호버비히클 두 대가 다가온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나는 비상탈출구로 뛰어든다.
배틀플레이어: “나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줘서 고마워, 자크”
이상한 사건들과 엮이고, 신분을 알 수 없는 검은 옷의 사내들에게 쫓기기 시작한 나는 WSL 파이널 매치가 펼쳐지는 유나이티드 스타디움으로 향한다. 미행을 당할 때는 인파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통합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게임인 ‘배틀’은 멀티플레이어용 가상현실 전투시스템으로, 프로 선수들의 경기 관람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포츠다. 오늘 유나이티드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역대 최다 우승자인 자크와 무서운 신예 루오손이 맞붙는 결승전. 이번 게임엔 천문학적 액수의 판돈이 걸려 있으며, 나 역시 체이서로 일해서 번 돈 오만 달러를 몽땅 베팅했다. 배당금을 두 배로 돌려받으면 정확히 십만 달러, 망막박리를 고칠 수술비가 된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자크가 오늘 밤, 나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내가 마주친 것은 VIP룸의 명패 속에 박힌 선명한 이름, 프랭크. 그리고 여전히 나를 뒤쫓은 검은 옷의 사내들이다. 더 나쁜 것은 승부의 신 자크가 내 눈앞에서 끔찍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희망은 사라졌다. 단지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만 계속될 뿐.
네 영혼을 팔아라, 그러면 전부를 얻을 것이다!
문지혁 장편소설 『체이서』의 배경은 통합세기 14년. 세계대전 직후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에 남은 유일한 생존자들의 도시, 직사각형의 두 땅이 알파벳 V자 모양으로 겹쳐 있어 ‘브이시티’라 불리는 미래세계다. 인구의 80퍼센트가 부자와 중산층으로 이루어진 역삼각형 계층구조로 인해, 인간은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로봇과 안드로이드를 생산한다. 도시의 지배자인 인간은 통합정부를 중심으로 자연환경, 기후, 미디어, 공공시설, 안드로이드 개체수 등을 통제한다.
‘나’는 공장에서 생산된 직후 모든 안드로이드가 거쳐야 하는 품질검사에서 ‘도발 위험성과 폭력성, 불순응성’ 항목에서 감점을 받아 정상적인 경로로 유통되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나’는 출고 전에 폐기되었어야 하지만, 공장의 재고관리자는 뒷돈을 받고 블랙마켓을 통해 나를 빼내주었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나는 가짜 신분증을 사고, 슬럼가에서 험한 일을 처리해주는 ‘체이서’로 살아간다.
한편, 안드로이드 제조사인 트라이톤은 보다 뛰어난 성능의 안드로이드를 제작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거듭해, 시티 전체에 안드로이드를 공급하는 최대 기업으로 자리 잡았으며, 통합정부 대표위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의 7세대 프로젝트명은 ‘르아흐(신의 숨결)’, 안드로이드에게 인간의 영혼을 이식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트라이톤은 소울 캐처와 소울 도너 시스템을 고안한다. 세상에는 얼마간의 돈만 쥐여주면 자신의 영혼을 팔겠다는 인간들이 널렸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영혼을 갖고 싶어 하는 인간들도 부지기수다. 이들은 모두 트라이톤이 운영하는 ‘학교’에 모여 영혼을 추출하고 이식하는 실험에 참여한다.
인간의 장기를 복제해 만든 안드로이드는 모든 점에서 인간을 닮았지만, 철저하게 인간을 위해 소비되는 존재다. 이십대에서 삼십대 초반의 모습으로 ‘삶’을 시작해, 고작 몇 년간 생존하다 기능이 다하면 폐기된다. 인간에게 안드로이드는 단지 그들을 대신해 노동하는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안드로이드에게 인간의 영혼을 이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차원이 다른 안드로이드, 인간을 넘어서는 궁극의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인물, 트라이톤사의 기술담당 최고책임자 앤드루가 ‘나’를 필요로 한다. 나에게는 다른 안드로이드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삶의 비밀한 목적을 찾아가는 안드로이드 체이서의 놀라운 운명!
『체이서』는 과학소설의 형식을 취한 존재론 탐구서다. 작가는 삶의 목적과 기능을 회의하는 안드로이드 체이서가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영문을 모른 채 쫓기면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은 안드로이드에게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소모품 취급하지만, 인간 스스로도 영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영혼을 하찮게 여길뿐더러, 탐욕을 채우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언제든 없애버려도 좋을 무엇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 영혼을 추출당한 인간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리빙데드’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들을 혐오하는 트라이톤의 기술담당 최고책임자 앤드루는 인간의 모든 약점을 극복한 안드로이드를 제조함으로써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키려 한다.
영혼을 두고 인간과 안드로이드 들이 벌이는 싸움은 치열하고 냉혹하며 가차 없다. 안드로이드를 착취하는 인간과 이들에게 저항하는 안드로이드의 반란. 그 속에서 영혼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특별한’ 안드로이드 체이서. 이들은 각자 자신의 투쟁에 헌신함으로써,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밝혀내고자 한다.
“태초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누군가 온 우주에 ‘삶의 이유’라는 것을 부여하면서 비로소 세계는 시작되었다는 것. 누군가는 동의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세계는, 역사는, 삶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간에 벌어지는 쉼 없는 투쟁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저 하루하루 죽어가는 DNA 숙주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비루해질 것인가.” -작가의 말 중에서
“문지혁은 ‘영혼’이라는 아름답고 귀한 말이 촌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유물 취급받는 너무나 ‘스마트’한 세상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까지 던지고 있다. 기대대로다. 아니 기대 이상이다.『체이서』를 펼치는 순간,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온 세상이 기꺼이 움직일 것이다. 당신이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서 말이다. 멋지다.” -김경욱,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