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식도락 소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
“수입의 8할을 먹는 일에 소비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밥 한 끼를 먹더라도 주어진 여건 안에서 최대한 맛있는 걸 먹겠다는 식도락가로서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한 소녀. 고3이 된 그녀는 미술 입시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홍대, 신촌 일대까지 넓어진 생활반경을 맘껏 휘젓고 다니며 ‘미식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그 당시 서울에 몇 곳 안 되었던 버거킹 매장에 들러 버거킹 와퍼와 조우하고 신촌 명물거리의 유명한 분식집과 카페를 들락거리며 이미 절반은 대학생 흉내를 내고 다니던 와중, 급기야 상가 뒤편에 간판도 없이 서 있던 함바집의 단골이 된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소녀가 한 접시의 음식을 단지 끼니가 아닌, 추억의 매개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 누군가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추억에 잠기고 또다른 누군가는 어떤 풍경에 시선을 사로잡힌 채 추억에 잠기듯, 저자는 한겨울 휑한 오피스텔 복도를 채운 보리차 향에서 훈훈했던 어린 시절 난롯가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 입안을 가득 차오르는 애탕의 쑥향에서 어머니의 분주했던 손길을 생각한다. 새로운 음식은 꼭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가 어느 날 불쑥 가져온 군납용 씨레이션이 가끔 떠오르는 건, 유사시에 먹는 통조림 음식이 맛있어서라기보다는 어린 시절 온 가족이 씨레이션 상자를 둥글게 에워싸고 째깍째깍 통조림을 따던 풍경이 그리워서다.
오전 나절에 쑥을 캐는 것으로 시작한 긴긴 여정 끝에 마침내 저녁상에서 만난 애탕 속에는 마지막에 살짝 풀어넣은 달걀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었고, 그 사이로 동글동글한 예쁜 완자들이 윤기 나는 모습으로 담겨 있었다. 동그란 완자를 한입 먹으면 녹말옷을 입혀 매끈해진 완자가 부드럽게 입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함께 떠넣은 구수하고 따끈한 육수가 완자에 촉촉함을 더하면서 입안 가득 퍼지는 기분 좋은 향기가 어쩐지 마음까지 꽉 채우는 것 같았다. 흙내 같기도 하고 한약 냄새 같기도 한 쑥 향기는 익숙하진 않았지만 정말 ‘맛있는’ 향기였다. _p191~191 「3월, 애탕의 맛」
음식은 엄마의 손맛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풋풋하기만 했던 첫사랑에 대한 추억도 환기시킨다. 금세 허기가 질 정도로 서로를 알아가기에 바빴던 어린 연인과 나눠먹던 컵라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쿠키를 구울 때면 늘 망치는 바람에 생겨버린 베이킹 징크스……. 그렇지만 이제는 두근거림조차 낯설어진 나이가 되어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고 싶어 쿠키를 만들 때 일부러 커피를 조금 넣어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만난 어린 연인들에게 슬며시 소라 접시를 내밀며 그들의 풋풋한 모습을 찬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억울한 건 아니다. 몇몇의 사랑을 떠나보내고 난 후, 이제는 식사자리에서의 행동만 갖고도 괜찮은 남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해낼 수 있는 내공이 쌓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다음 번에 또 일식집에 가게 됐는데, 이 남자가 그때도 깻잎튀김을 제일 먼저 집더니 혼자 다 먹는 거야! 맛있어서 제일 먼저 집어먹는 걸 텐데, 그걸 아는 사람이면 나한테 반쪽이라도 잘라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 같으면 그렇게 했을 거야. 그래서 다음에 한 번만 더 이러면 만나지 말아야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세번째로 일식집에 갔는데 또 깻잎튀김을 자기가 홀랑 먹잖아! 어떻게 이런 사람을 더 만날 수 있겠어? 그래서 안 만나기로 했어. _ p64 「이게 다 깻잎튀김 때문이야」
남편 대신 키친에이드를 들인 요리선생의 싱글 예찬
『추억은, 별미』 에는 식도락 소녀가 당당한 싱글 여성이 되기까지, 그 수많은 날들을 빼곡히 채워온 추억의 조각들이 하나씩 펼쳐진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요리야말로 자신의 길이란 생각에 일산에 쿠킹 클래스 ‘라자냐’s 키친’을 마련하기까지, 거의 칠팔 년의 시간이 걸렸다. 요리잡지 푸드스타일리스트와 요리 관련 콘텐츠 개발자로 일하는 동안에는 주말과 공휴일까지 반납해가며 출근하는 워커홀릭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량한 월급’을 위해 소중한 사람들과 나눌 행복한 시간들을 포기하며 인생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사표를 던지고 프리랜서로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쌓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엑셀 파일로 스케줄러를 만들어 한 칸 한 칸 채워가며 계획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랜서로서의 삶은 험난했다. ‘프리’라는 단어와는 다르게 자유뿐만 아니라 책임도 함께 따르다보니 몸이 아파도 맘 편히 쉬지 못하고 앞마당에 흐드러진 벚꽃을 보며 꽃술을 마시자는 친구들과의 약속도 아직까지 지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음식으로 지친 심신은 음식으로 위로를 받는 법이라, 홀로 부엌에 앉아 고요히 빵이 부풀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주는 위로에 마음을 다잡곤 했다.
혼자 지어놓은 생각의 집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스스로를 구해야 할 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의지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 어떤 일도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처럼 절망적일 때엔 밀가루를 꺼내 계량하고, 이스트를 넣은 다음 길고 긴 시간 동안 반죽을 했어. 그러고는 반죽이 부풀어오르는 모양을 들여다보며 오븐 앞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있었지. 내 뜻대로 만들어지는 빵을 보며 오븐 안의 작은 세상에서만큼은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음에 안도했던 기억이 나. 그리고 무엇보다 오븐이 주는 온기가 따뜻한 위로가 되어 내 마음을 녹여주었던 것 같아. _p26~27 「빵을 굽는 밤」
단지 결혼을 안 했을 뿐인데 결국엔 결혼도 ‘못한’ 사람 취급을 받고, 그런 반응에 신경 쓰지 않으며 씩씩하게 살려고 했을 뿐인데 ‘용쓴다’는 소리나 듣는 그녀에게 군더더기 없는 위로를 건네는 건 바로 친구들과 함께하는 브런치, 결국 한 접시의 음식이다. 비록 빵 반죽을 대신 해줄 남편도 없고 쿠킹 클래스에서 사용할 식재료를 날라줄 어시스턴트도 없지만 상관없다. 남편이 없으면 그보다 ‘어메이징’한 능력을 발휘하는 키친에이드를 마련하면 되니까.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요리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며 추억을 쌓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인생은 충분하다.
어서 오세요, 라자냐의 키친입니다
문득 외로운 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읽다 마음이 동해 혼자 굴튀김을 해먹을 수도 있고 딱 떨어지는 샴페인 잔에 술을 따라 홀짝이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지만, 누군가를 위해 빵을 굽고 함께 음식을 만들며 수다를 떠는 것도 또다른 기쁨이다. 그래서 저자는 오늘도 ‘라자냐’s 키친’을 열고 음식과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추억을 만들어나간다. 수강생들도 수업을 듣고 나면 꼭 뭔가 치유 받은 느낌이라고 말할 정도다. 평생 입에 대지 않을 줄 알았던 가지가 맛있는 요리로 탈바꿈하는 걸 지켜보면서 삶을 향한 새로운 도전의식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맛있는 음식을 한입 베어 문 순간 머릿속에 종이 울리듯, 음식의 마법 같은 힘을 통해 사람들은 한순간에 변화되기도 한다.
클래스 메뉴 중에 ‘가지미소구이’가 있는 날에는 그것이 ‘가자미구이’의 오타이길 바라며 수업에 왔노라 말하는 사람까지 만났을 때, 나는 앞으로 맛있는 가지 요리 레시피를 더욱 많이 시도해봐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나락으로 떨어진 가지의 위상을 되살리겠다는 요리선생의 굳은 결심은 구국의 심정과 같았다. (중략) 이제껏 모르고 살아서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이 비단 ‘가지의 맛’만은 아닐 것이다. 먹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가지의 맛처럼, 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길들이 참 많다. 인생의 즐거움은 때때로 가보지 않은 길에 더 많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_p126~128 「‘가지’ 않은 길」
저자는 틀에 매이는 생활이 싫어 당분간 식당을 차릴 생각은 없지만, 만약 마음이 바뀐다면 어느 한적한 골목에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식사할 테이블이 놓인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식당을 꾸려볼 생각이다. 메뉴는 따로 없이 그날 날씨나 기분에 따라 음식을 차려내는 불친절하면서도 포근한 식당.
그래도 만에 하나 식당을 차리게 된다면, 대로변에서 되도록 먼 주택가 뒷골목에 아주 조그만 가게를 차리고 싶다. 어차피 가진 돈이 별로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행여 어쩌다 돈이 많이 생긴다 해도 식당이라곤 없을 것 같은 조용한 주택가 골목길 끝에서 노란 불빛 하나가 반짝이는 게 보이면 그게 내 식당이라고 손님들에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곳에 차리고 싶다. 천장은 낮았으면 좋겠고 창문은 하나 정도면 괜찮은데 가로가 긴 대신 높이는 좀 낮아서 창밖에 눈이 내리는 풍경을 예쁜 액자처럼 담을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_p272 「라자냐의 불친절한 키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