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그려낸 지독한 슬픔의 미학
프랑스의 유서 깊은 문학상 되마고 상 Prix des Deux Magots 수상 작가 이네스 카냐티의 『파란 섬의 아이』가 출간되었다. 이네스 카냐티는 1973년 발표한 첫 작품 『휴일』로 로제 니미에 상 Prix Roger Nimier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작가이다. 『파란 섬의 아이』는 작가의 두 번째 소설로, 세상에서 소외된 채 엄마와 함께 외롭게 살아가면서도 꿈을 놓지 않았던 한 소녀의 성장기를 담아내고 있다.
프랑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농부들의 일상과 자연의 모습이 아름답고 평화롭게 묘사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두 모녀의 삶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작가는 간결하고 감정이 절제된 문체를 사용하여 그들의 불행을 담담하게 표현하지만, 그 담담함 이면에 지독한 슬픔이 묻어난다.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짤막한 문장들은 마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공쿠르 상 후보로까지 거론되며 여러 평론가와 언론으로부터 훌륭한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침묵 속에 갇힌 엄마, 그런 엄마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딸 마리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 여우들이 사는 하얀 모래언덕 옆 오두막집에 ‘미치광이 제니’라 불리는 엄마와 딸 마리가 외롭게 살고 있다. 엄마 제니는 마을의 좋은 집안에서 자라난 명랑한 소녀였으나 열일곱 살 때 강간을 당해 아이를 갖게 되었다. 집안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제니는 딸 마리를 낳고 다 쓰러져가는 외딴 집에서 살아간다. 그후 그녀는 말문을 완전히 닫은 채 마을 사람들 집에서 품삯도 제대로 못 받고 잡일을 해주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미치광이 제니’라고 부르며 함부로 대한다.
제니의 침묵은 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엄마만을 바라보며 따라다니는 딸 마리에게 “엄마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지 마라” 혹은 “가서 자거라” 등의 말만 툭툭 내던질 뿐이다. 하지만 마리는 그런 엄마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엄마가 자신을 두고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항상 두려워하며, 늘 엄마 곁에 있고 싶어하는 어린 소녀 마리, 엄마의 침묵과 텅 빈 듯한 눈빛에 마리는 엄마의 사랑을 더욱더 갈구하며, 아름다운 ‘파란 섬’에서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게 된다.
고단한 일상, 반복되는 불행
제니가 홀로 일을 하러 가는 날이면 마리는 버드나무 우는 강가에서 늦은 밤까지 엄마를 기다린다. 밤늦게 돌아온 엄마에게 매달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녹초가 되어버린 제니는 딸의 바람을 알지 못하고 깊이 잠들어버린다. 모녀가 함께 다른 집에 일을 하러 갈 때면 마리는 쉬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아무 말 없이 혼자 처리하는 엄마의 모습을 좇는다.
종종 외갓집에 놀러 가곤 하지만 매번 외할머니의 천대에 상처를 입고, 성당에서 마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준 젊은 신부님은 어린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석공이 마을 길을 맴돌며 마리를 눈여겨보곤 했는데, 어느 날 그가 마리의 집으로 들어와 엄마를 기다리던 마리를 성폭행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애정에 굶주리고 무관심과 외로움에 지친 마리에게 마침내 친구가 생긴다. 엄마가 면장의 집에서 받아온 눈먼 암송아지 로즈와 오리 브누아. 동물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마리는 차츰 상처를 잊어가지만, 마을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브누아를 놓아주고 로즈를 내다 팔 수밖에 없었다. 가뭄이 지나고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창밖의 이상한 소리에 밖으로 나간 마리는 우물에 빠진 송아지 로즈를 발견한다. 용케도 집을 찾아왔지만 앞을 보지 못해 우물에 빠져버린 로즈는 마리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죽는다.
이러한 여러 일들을 겪으며 마리는 엄마에게 매달려 말한다. 저기 먼 곳, 파란 섬으로 가자고. 늘 아름답게만 꿈꿔왔던 그곳이지만, 지금 마리에게 그곳은 견딜 수 없는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가 된 것이다.
“나는 널 파란 섬으로 데려갈 거야.”
힘겨운 현실 속에서 휴식처와도 같은 피에르를 만나다
이 작품은 여러 개의 짤막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마다 나오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반복되는 불행 가운데서 독자의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 바로 마리와 피에르와의 만남이다.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비행기 조종사 피에르, 그는 마리에게 자신이 태어난 아름다운 섬 이야기를 들려준다. 태양이 이글거리고 필라오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협죽도 향기 가득한 파란 섬으로 마리를 데려가겠다고 말하며 미래를 약속한다. 피에르를 만날 때면 마리는 잠시 슬픈 일들을 잊고 행복한 꿈에 젖어들 수 있었다. 피에르는 마리에게 휴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피에르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갈을 받게 되고, 장례식에서 피에르의 이모를 만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외롭게 자라왔던 피에르의 아픈 과거를 알게 된다.
그치지 않는 성장통
전부터 엄마 제니에게 욕망을 내비친 마을 사내들이 몇 있었지만 제니는 단호하게 거절해오곤 했다. 앙투안이라는 남자가 제니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을 때도 마리는 엄마가 당연히 거절을 하리라고, 자신과 둘이서만 살기를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의 예상은 빗나간다. 제니는 마리를 상급 학교에 보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앙투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리는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이 몹시도 가슴 아팠지만, 엄마가 원하는 대로 다른 고장에 공부를 하러 가기로 결심한다.
마리가 먼 곳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앙투안과 제니는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는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마리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이 더이상 공허하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와 아기가 자신은 알 수 없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챈다. 마리는 어린 동생에게 말한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아름다운 파란 섬으로 데려다주겠노라고.
마리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본문 발췌
엄마는 저녁에 불 앞에 앉아 종종 울곤 했다. 그럴 때 엄마의 두 눈은 눈물 빛깔을 띠었다. 엄마가 말했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나는 말했다.
“내가, 내가 있잖아요.” _ 본문 19쪽
피에르가 왔다. 그가 말했다.
“마리, 나의 꽃. 나는 너를 먼 곳으로, 협죽도가 핀 감미로운 섬으로 데려갈 거야. 붉은 꽃들이 활짝 피어 바람 속에 핏빛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곳으로. 나는 너를 왕귤나무 정원으로 데려갈 거야. 그러면 우리는 바닷물에 흔들리는 먼 섬 깊은 곳에서 잠이 들 거야.” _ 본문 107쪽
갑자기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는 눈물 빛깔을 띤 맑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다.
“엄마, 우리 떠나요. 멀리 떠나요. 나무들이 태양까지 닿는 나라로 가요, 그곳에서 아카시아 숲 속으로 끊임없이 야생 시클라멘을 찾아다녀요.” _ 본문 138쪽
소설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는 사람들이 드러내어 말하기를 꺼려하는 생래적인 ‘폭력성’과 ‘야만성’이 숨겨져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날것’의 폭력과 비극성을 카냐티만큼 시적이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는 드물 것이다. _ 옮긴이의 말에서
♦ 해외 리뷰
가슴 저미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책은 작가의 재능을 확증하고도 남는다. _ 르 몽드
카냐티는 이야기를 눈부시게 끌어가고 장면을 드라마틱한 힘으로 매우 간결하게 구성하는, 자기 세대의 가장 훌륭한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_ 르 수아르
이녜스 카냐티는 짤막한 문장들을 통해 칼날처럼 날카롭게 침투하며 우리에게 쉽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을 선물한다. 이 소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_ 라 크루아
♦ 지은이와 옮긴이
지은이 이네스 카냐티 Inès Cagnati
1937년 프랑스 남서쪽 몽클라르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현대 문학을 공부하였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첫 작품 『휴일 Jour de congé』(1973)로 로제 니미에 상(Prix Roger Nimier)을 수상하였고, 1977년 발표한 『파란 섬의 아이 Génie la folle』로 되마고 상(Prix des Deux Magots)을 수상하였다.
옮긴이 최정수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연금술사』『오 자히르』『단순한 열정』『꼬마 니콜라의 쉬는 시간』『빈센트와 반 고흐』『밤의 클라라』『숨쉬어』『악마의 개』『오를라』『한 달 후, 일 년 후』『마음의 파수꾼』『찰스 다윈-진화를 말하다』『거짓말 제조기』 등이 있다.
▣ 2008년 10월 16일 발행
▣ ISBN 978-89-546-0682-0 03860
▣ 128 * 188(양장) | 248쪽 | 10,000원
▣ 책임편집 이은현(031-955-2653, singing36@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