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각거울」로 등단한 작가 김지현의 첫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생생한 인물 묘사와 농익은 주제의식으로 삼대에 걸친 여인들의 신산한 삶을 밀도 있게 형상화했다는 호평을 받았던 등단작 「사각거울」을 포함해 총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에는 꾸준히 그리고 집요하게 여성의 몸에 천착해온 ‘여성’작가 김지현의 뜨거운 모성적 에너지가 잘 녹아 있다.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그 이름, 여자, 여자, 여자
멧돼지처럼 퉁퉁한 식당 아줌마, 생계를 위해 옥상 난간에 서서 위험천만한 포즈를 취하는 다리모델, 약 부작용으로 온몸에 굵은 털이 자라는 여자, 임신중독증에 걸린 딸과 그 딸을 보살피는 알코올중독자 엄마…… 김지현 소설에는 도처에 여자들이 있다. 간혹 남자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들은 “미끈거리는 오징어 몸통” 같은 하얀 손등을 갖고 있거나(「털」) 어릴 적부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자라온(「인형의 집」), 여자보다도 더 여자 같은 남자들이다.
소설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이 ‘여성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줍고 여린 이미지와는 무관하다. 김지현 소설에서의 여성성은 야성적인, 본능에 충실한 ‘야생의 여성성’이다. 백 년 묵은 간장으로 식당을 찾아오는 유약한 남자들을 열정과 폭력에 휩싸이게 하는 멧돼지 아줌마 L은 “밤톨만한 젖꼭지”로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고(「멧돼지 이야기」), 서른여섯 살의 미혼녀인 ‘소녀’는 질서와 절제를 생활신조로 삼지만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303호 여자의 땡땡하게 부푼 젖가슴과 싱싱한 입술을 보고 무의식적인 페티시즘을 느낀다(「초대」). 술 석 잔에 “심장에서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그곳에 꽁꽁 쟁여놓았던 ‘뜨거움’이 마구 쏟아져나와” 다리를 벌리고 쾌락에 빠져드는 엄마의 모습은 어떠한가(「나무구멍」). 김지현 소설의 여자들은 이처럼 그녀들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원초적 욕망을 발산한다.
젖과 탯줄의 기억
‘젖’과 ‘자궁’으로 표현되는 이 여성성은 또한 모든 생명을 낳아 기르는 ‘모성’과 통한다. 이 모성은 무조건 희생하는 전형적인 모성애와는 상관없는 그저 순수한 욕망일 뿐이지만, 생명에 생기를 부여하고 일말의 가식 없는 육체적.정신적 교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여성들 간에 이러한 교감은 활발하게 일어난다. 식당 주인 S는 L에게서 풍기는 젖냄새에 취해 L의 젖가슴에 코를 박는 상상을 하고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새삼 우쭐해하며(「멧돼지 이야기」),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하기에도 너무나 어린 손녀딸이 치매 걸린 할머니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사각거울」). 어미의 어미를 찾는 뱃속 아기의 간절한 호출로 가출 칠 년 만에 엄마를 찾아온 딸은 알코올중독자 엄마의 쾌락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쾌락에 동참하고 싶어하고, 엄마는 딸의 자궁에 들어앉은 새 생명을 위해 나물을 캐온다. 심지어 생활보호 대상자인 그들을 관리, 감시해야 하는 동사무소 여자까지 엄마와 함께 “딸의 자궁이 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뿐만 아니다.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는(있어야 할) 여자들 사이에도 연대관계가 형성된다. 온몸에 굵은 털이 자라는 여자의 남편과 바람난 ‘나’는 여자의 얼굴에 실면도를 해주고 여자는 위험에 처한 ‘나’의 무기(가위)를 손질해주기 위해 다가온다(「털」). 한 남자와 각각 동거한 경험이 있는 두 여자는 서로를 미행하며 묘한 유대감을 느끼기도 한다(「미행」). 분쟁을 일으키는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성들의 세계 그 어디에도 질시나 다툼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론가 조연정의 말을 빌리면 “그녀들에게는 서로를 이어주던, 정확히 말해 서로의 자궁을 이어주던 ‘탯줄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지현은 세상과, 타인과 소통할 수단으로 ‘탯줄’을 떠올리고 있다. 하나같이 고통스럽고 상처투성이인 인물(특히 여성)들에게 어머니의 젖으로, 자궁으로, 탯줄로 양분을 공급해주고 있다. “어머니의 심장소리와 뜨거운 피를 기억하는 작가”, “우리가 떠나온 것” 안에서 진리를, 미래를 찾고 있는 작가 김지현의 다음 발걸음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제 막 자궁에서 나온 신인작가의 뜨겁고 순수한 열정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 수록작품 발표지면
「멧돼지 이야기」 _『세계의문학』 2007년 봄호
「사각거울」 _『문화일보』 2002년 신춘문예 당선작
「털」 _『현대문학』 2002년 4월호
「초대」 _『황해문화』 2006년 여름호
「나무구멍」 _『21세기문학』 2006년 가을호(「엄마의 얼굴」로 발표)
「플라스틱 물고기」 _『문학동네』 2002년 겨울호
「고무공」 _『한국문학』 2003년 여름호
「인형의 집」 _『작가세계』 2003년 가을호
「미행」 _『문학사상』 2005년 12월호
뜨겁고 표독한 몸의 언어
신인의 등장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한다. 어찌 햇빛 아래 새로움이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 동안 우리가 또한 어둠에 얼마나 익숙해 있었던가. 불변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듯 가변성(시대성) 또한 우리의 삶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가변성에 대한 목마름이 불변성에 대한 그것을 능가하고 싶은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신인 등장에 촉각을 세우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데뷔작 「사각거울」이 유독 주목받은 까닭은 어디에서 왔을까. 사각거울에 사타구니 비추길 일삼는 치매의 시어머니, 이를 지켜보는 어린 딸을 가진, 직장녀인 한 중년 과부의 내면을 다룬 이 데뷔작이 지닌 남다른 데는 육체가 지닌 칙칙함이 아니었던가. 맑은 불꽃이 아니라 시커멓게 노린내 피우며 타오르는 그런 불꽃이라고나 할까. 조각에 비유하자면 토르소에 가깝다고나 할까. 요컨대, 모종의 잠재력이랄까 에너지가 잠겨 있는 형국이었던 것. _김윤식(문학평론가)
김지현의 단편에 상세하고 정교한 묘사를 통해 제시된 모든 사물의 디테일 속에는 한 이미지가 마치 낭자한 피처럼 퍼져 있다. 그것은 몸의 이미지이다. 사랑과 증오, 선망과 원한 등 모든 관계의 경험은 끊임없이 반동하고 융기하고 전율하는 몸의 경험으로 치환된다. 김지현 소설에서 몸은 현대인의 몸이 상품의 휘황한 외양을 탐하면서 억압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일하고 다치고 분비하고 배설하는 몸이자, 성별의 차이마저 넘어 야생의 혼돈을 향해 열려 있는 몸이다. 기성 담론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대항을 모색하고 있는 최근 소설에서 그 물질적 신체의 언어만큼 뜨겁고 표독한 언어도 드문 듯하다. _황종연(문학평론가)
* 2007년 10월 18일 발행
* ISBN 978-89-546-0419-2 03810
* 신국판 | 328쪽 | 10,0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고경화(031-955-3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