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 송승환이 첫 시집을 펴냈다. 『드라이아이스』라는 휘발성 짙은 표제 아래 엮인 마흔다섯 편의 시에는, ‘오늘의 말’에 올라탄 사물과 현상들의 강퍅한 존재방식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홀홀히 묻어난다. 그가 포착한 이 물상들의 존재방식은, 극도로 정제된 그의 시편들을 통해 낯선 낯으로 현현한다.
엉뚱한 관계를 증식시키고 그 속에 자신을 연루시키는 사물들
시인이 포착하는 물상의 면면은 일상의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아주 낯선 현장들투성이. 그의 시 속에 묘사되는 물상을 구성하는 질료들은, 그것 본연의 물리적 특성을 전면적으로 해체한다. 그 물상들은 일상적이고 일차적인 개연성을 지니지 않은 자연물들의 움직임으로 치환하고, 이로써 독자는 편치만은 않은 이물감을 경험하며 그들의 일상적 시선을 철회하는 기회를 맞이한다. 이렇게 자연물과 연동되어 해체되고 재구성된 인공물들의 이미지는 때로는 시리고, 때로는 뜨거우며, 때로는 비릿하고, 때로는 섬뜩하며, 때로는 물컹하고, 때로는 꺼끌꺼끌하다.
십자가 아래 짐승의 신음소리 흘러나온다 오른쪽으로 돌아갈 때마다 살갗을 파고드는 고동치는 심장 탄력 있는 발 한없이 투명한 두 눈의 빛 피 묻은 컨베이어에 실려오는 모든 것들이 용광로를 거쳐 단단한 골격에 조여든다 십자가와 십자가 사이로 내려오는 붉은 달빛마저 감기고 만다 쉴새없이 돌아간다 자동차가 태어난다
큰 시계 바늘이 돌아가고 있다
- 「드라이버」 전문
이처럼 격정적인 움직임을 통해 물상들은 오래 묵은 제 물성을 문득 잃은 채 새로운 일단의 모양새를 갖춘다. 하지만 그 장력이 미치는 물상의 표면은 결코 넘실대지 않는다. 시인은 자신이 바라본, 혹은 자기 앞에 현현한 물상들의 모습을, 꼭 그만큼의 언어로 내어놓는다. 이로써 시에 묘사되는 생경한 모습들 하나하나가 온전한 동심원을 유지하며 독자에게 다가간다. 예컨대, 시인이 바라보는 거울은 “직사각형으로 고여 있”는 “불에 녹은 모래”이며, 그것은 “산산이 부서져 날카로운 물방울”을 이루며 파괴된다(「거울」). 오프너는 “머리 없는 투명한 육체”를 가진 “왕의 목”에 “한 자루의 劍”이 되어 꽂히고, 그로써 “녹슨 왕관”은 솟구쳐오른다(「오프너」). 「스피커」의 전문은 이렇다. “게가 구멍에서 기어나온다//파도가 갯벌에 물결을 새겨놓았다”. 한편 캔은 “그녀의 입술과 헤어진/귀는/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고막//밖으로 흘러내리는/찢어진 고름”(「캔」)으로 묘사된다.
효험 없는 기호와 가짜 유비의 감옥에서, 바라보기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낯선 세계의 모습은, 오롯한 유비가 선사하는 개안의 희열, 그 새로운 지평의 광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하나의 기호가 아무런 기억의 확장도 없이 누적되는 단절로서의 시간을 깨닫게 할 뿐이다. 이 단절과 폐쇄의 유비는 그것이 일종의 우주론으로 확장할 때 그 끔찍함을 드러낸다.
날름거리는 가로무늬근육 오돌토돌 돌기들 숲 속 울려 퍼지는 프리지아 다알리아 로즈 아카시아 피튜니아 튤립 크로커스 아이리스 울렉스 카피르나리 작약 피라칸타 라일락 실유카 코리앤더 마타리 부들레이아 치자 마르시아 루드베키아 바이올렛 화이트바리에가티드 수련 핑크자이언트 푸니세우스 플레너스 마로니에 풀체리무스 브레던스프링 릴리
아이가 造花工 혀 끝에서 피어오르는 꽃을 바라본다
- 「U」 전문
조화옹(造化翁)으로 읽을 수 있는 “造花工”은 “혀 끝”으로 꽃을 피운다. 이 조화공은 창세기의 신과는 달리, 혀의 가로무늬근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신이 공인으로 축소되는 가운데 “혀 끝”이라는 표현으로 은유되는 말의 타락이 발생한다. 사물 그 자체인 언어는 더이상 없고, 말들은 모두 기호가 되었다. 유비의 진정한 원리일 우주 자체가 벌써 혀의 상형이자 universe 같은 말의 첫 글자일 ‘U’로 기호화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물건들에 갇혀 있으며, 효험 없는 기호와 가짜 유비의 감옥에 들어 있다.(황현산, 「유비의 감옥과 그 너머」)
한 시대를 덮은 사물의 재앙, 말의 재앙을 자기 책임으로 떠맡으려는 희생의지
혹자는 송승환이 지나친 자기검열의 불모성과 서정의 부족을 사물과 시에 대한 비관적 전망으로 메우려 한다고 의심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물과 사람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의 미약한 관계를 두려워하는 그는, 감정이 가장 낮게 가라앉은 순간을 관찰과 생각의 표준으로 삼을 뿐이다. 이는 그가 서정을 가장 단단하게 창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시인의 자기 노력은 시 「函」에서 잘 드러난다.
시인 그 자신일 “아이”는 제가 지닌 “낱말 카드를 하나씩 불 속에 집어던”져 빛과 열기를 얻는다. “불꽃”은 어둠과 추위를 다 막지 못하고 재(灰)가 되고 재앙(災殃)이 되지만, 이 불 피우기는 재앙 하나씩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이는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 그 순결한 길로 “걸어나간다”. 이로써 아이는 타락한 기호와 가짜 유비의 감옥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길은 물론 죽음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상징적 죽음은 한 시대를 덮은 사물의 재앙, 말의 재앙을 자기 책임으로 떠맡으려는 희생의지와 다름없다.(황현산, 「유비의 감옥과 그 너머」)
송승환은 “바라본다”는 한마디로 첫 시집 『드라이아이스』의 자서를 대신했다. 그의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이 가 닿는 곳, 거기서 만들어지는 새롭고 독창적인 세계를 함께 ‘바라봄’으로써 독자의 편에서 다시 태어날 또다른 세계가 문득, 궁금하다.
시사적 맥락에서 볼 때, 『드라이아이스』의 가장 두드러진 면모는 황순원의 『골동품』의 세계를 재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상의 유사성에서 출발해 낯선 자연들을 호환시키고 실사의 동사화를 통해 말놀이 공간을 풍선처럼 띄우는 이 이질동형의 설화적 우주를 송승환은 한편으로 충실히 복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전복시키고 있는데, 어떻게 그러냐 하면, 낯선 자연들 대신에 사회를 자연으로 풀어냄과 동시에 그렇게 이루어진 자연세계를 다시 은폐된 사회 쪽으로 역류시킴으로써 그렇게 하며, 왜 그러냐 하면, 말놀이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고뇌의 공간을 구성하려는,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성찰과 세계 형성의 과정을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시인의 의욕이 범상치 않게 들끓기 때문이다. _정과리(문학평론가)
현실의 세부가 초현실을 만들듯이, 송승환의 장기인 말의 섬세한 선택과 정교한 배치는 자주 계산과 논리를 몽환의 형식으로 바꿔놓는다. 꿈이 이성과 논리를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범접할 수 없도록 섬세한 이성이며, 가닥을 짐작할 수 없도록 중층으로 얽혀 있는 논리일 뿐이다. 이지적인 시인 송승환의 자기 검열은 꿈과 환상에 대한 배척이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끈질기고 확실하게 그것들과 교섭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또한 이 시인에게는 근대를 통과하는 한 방식이다. _황현산(문학평론가)
* 2007년 8월 6일 발행
* 128*188 | 68쪽 | 값 6,000원
* ISBN | 978-89-546-0357-7 03810
* 담당편집 | 조연주, 장영선(031-955-8865, 8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