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말하기
편혜영의 소설은 이제 ‘악몽의 일상화’가 아니라 ‘일상의 악몽화’를 겨냥한다. 이 변화는 명백한 진화다. 욕망이 재능을 만나면 역사가 된다. 이번 작품집에서 그녀는 그녀가 욕망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해내고 있다. 신형철(문학평론가)
그렇다. 편혜영의 소설은 확실히 변했고, 변하고 있고, ‘진화’하고 있다.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 곳곳에서 넘쳐나던 시체들은, 코를 찌르던 악취는, 선연했던 핏자국은 사라지고 없다. 아비규환의 ‘아오이가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일상’이라는 공간이다.
변두리 도시의 동물원(「퍼레이드」), 새로운 생활을 꿈꾸며 매일같이 증명사진을 찍고 이력서를 새로 쓰는 택배기사(「첫번째 기념일」), 힘들게 마련한 전원주택단지에서 꿈을 키워가는 소시민(「사육장 쪽으로」), 지친 일상에서 겨우 벗어나 짧은 여행을 꿈꾸는 오래된 연인들(「소풍」), 매주 금요일 일상이 되어버린 흥미 없는 카드게임을 벌이는 도시근로자들(「금요일의 안부인사」), 직장상사의 눈에 들어 승진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회사원(「분실물」) 등이 이번 소설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며 공간들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일상들은 과연 안전한 것일까. 얼핏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도시의 변두리,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인물들은 과연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편혜영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오히려 일상 속에, 도시의 평범한 현실 속에서 만나게 되는 공포가 더 섬뜩한 것은 아닌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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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서로에게 더이상 새롭거나 설렐 것이 없는 오래된 연인은 오랫동안 별러왔던 여행을 떠난다. 도시생활의 고단함을 일거에 보상받을 수 있는 여행이 되리라 짐짓 기대하지만, 여행은 시작부터 왠지 삐걱거린다. 연인에게 이번 여행은 오랜 동경(憧憬)의 실현이기는커녕 그간 억압해왔던 긴장이 끔찍한 방식으로 폭발하는 계기가 된다. 불길한 안개가 지겨운 동행처럼 따라붙고, 안개는 연인들의 차를 두 건의 사고로 몰아넣는다. 연인들은 끝내 함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된다. 여자의 허기가 어느 순간 구토로 돌변하듯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상은 악몽이 되고 만다.
「사육장 쪽으로」 | “전형적인 도시인”인 남자는 “전원주택이야말로 도시인의 꿈이 아니겠느냐”고 허세를 떨며 시 외곽의 전원주택으로 옮겨온 터다. 그러나 삶은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 이 남자는 파산지경에 이르고 만다. 재산 압류를 예고하는 경고장이 이윽고 집으로 날아온다. 언제 집이 압류 당할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과 짝을 이루는 것은 어딘지 모를 사육장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의 불길함이다. 그들은 언제 오는 것이며 개들은 어디서 짖고 있는 것인가. 이 불확실성의 상태는 아이가 실로 급작스럽게 사육장 개에게 물어 뜯기게 되면서 끔찍한 악몽의 근원이 된다. 병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육장 근처에 있다. 사육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개 짖는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들려오고 “도시 전체가 사육장”이라 해도 좋을 지경에 이르면 이제 낯익은 일상은 완벽하게 낯선 것으로 역전되고 만다. 남자가 마침내 “자신이 찾는 것이 사육장”인가, “아이를 치료할 병원”인가, 아니면 “아이를 물어뜯은 개”인가.
「분실물」 | ‘박’은 상사인 ‘송’에게서 비밀스러운 업무를 부탁받는다. 그것이 박에게는 ‘전원주택’이자 ‘W시로의 여행’인 셈이다. 이 업무만 멋지게 해내면 ‘박’의 인생도 달라질지 몰랐다. 공연한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될 거였고 아내도 더이상 남의 아이들을 돌볼 필요가 없을 거였다. 박은 며칠 밤을 새워 마침내 일을 끝낸다. 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악몽은 시작된다. 아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개에게 물리듯 혹은 안개 속에서 불시에 사고가 일어나듯, 박은 업무 관련 서류를 지하철에서 잃어버린다. “가방은 없었다.” 악몽은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도 단순명료하게 찾아온다. 그후로 낯익은 그 모든 것들이 더이상 낯익은 것이 아니게 된다. 박은 송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동료 김의 얼굴도, 거래처 직원들의 얼굴도 잊어먹는다. “이러다가 자기 얼굴마저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태는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고 박은 결국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위에 소개한 세 작품 외에도 문화재보호지구에 사는 이유로, 허물어져가는 담장 하나 마음대로 고치지 못해 몰래 작업을 하던 중 끔찍한 사고를 당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밤의 공사」)나, 동물원에서 탈출한 늑대를 잡기 위해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사냥하게 되는 도시민들(「동물원의 탄생」)의 이야기는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를 이야기하기에 충분하다.
작가는, 위험이 의외의 것에서가 아니라 설마 했던 바로 그것에서 닥쳐올 때 섬뜩함이 초래된다는 사실을, 희망의 계기가 될 줄 알았던 것이 역설적이게도 파국의 계기가 될 때 섬뜩함이 초래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자, 오늘을 살고 있는 당신의 일상은 과연 평화로운가……
교외의 전원주택에 사는 평범한 월급쟁이 가장에게 어느 날 닥친, 가족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사건 사고는 마치 내가 직면한 위기처럼 리얼하게 다가온다. 사육장에서 탈출한 개에게 물린 아이를 데리고 차를 모는 병원 방향이 사육장 쪽이라는 것, 그가 운전해가는 신작로와 고속도로에서 그를 앞지르거나 스치는 트럭, 트레일러 등 큰 기계에 대한 그의 무서움증에서 우리는 현대사회를 사는 공격적이지 못한 소시민의 위로받을 수 없는 불안과 분노와 피해의식을 본다. 박완서(소설가)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는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순응주의적인 회사원 가장을 에워싸고 다가드는 일련의 위협적 사건과 상황을 개인적 두려움에서 인간 보편의 조건으로 서서히 이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단순하고 건조한 문체로 거의 평면적일 정도의 구성 속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의 조건을 강력한 현실감으로 살려낸 그 고전적 미덕에 있어 돋보인다. 공산품 특유의 자동성, 규칙성, 반복성, 맹목성에 길든 무반성적인 삶은 파산을 알리는 경고장, 대형 트럭과 각종 기계음의 지속적인 소음과 속도, 사육장의 개 짖는 소리, 불쑥불쑥 숨겨진 무덤처럼 직접적 “접촉” 없이 “신호”로만 기능하는 각종의 강박적 위협 아래 놓이면서 문제의 해결보다는 오히려 그 신호의 “인도”를 받아 길들여지면서 돌이킬 길 없는 파멸로 치달린다는 경고만 같아 그 어조의 소박함이 오히려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김화영(불문학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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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및 수록작품 발표지면
소풍 7 2006년 겨울, 『문예중앙』
사육장 쪽으로 35 2006년 여름, 『창작과비평』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작)
동물원의 탄생 63 2006년 가을, 『한국문학』
밤의 공사 93 2005년 8월, 문장 웹진
퍼레이드 121 2006년 2월, 『현대문학』
(2007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금요일의 안부인사 149 2007년 여름, 『작가세계』
분실물 177 2007년 봄, 『문학동네』
(2007 이효석문학상 후보작)
첫번째 기념일 203 2006년 10월, 『문학사상』
(2006 이상문학상 후보작)
해설|신형철(문학평론가) 섬뜩하게 보기 231
작가의 말
* 초판발행 | 2007년 7월 20일
* 145*210 | 256쪽 | 값 9,500원
* ISBN | 978-89-546-0359-1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고경화(031-955-8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