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1인 무의식을 읽는 방법
소설의 99는 의식이다. 회화나 시와는 달리, 일상적 언어로 일상을 이야기하는 소설에서는 모든 것이 오직 ‘살짝’ 비켜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에서 시작된 이 파격은 텍스트 전체로, 나아가서는 작품세계 전체로 퍼져나간다. 그러므로 이 파격은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해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똑같은 크기의 활자로 찍혀 있지만 소설에서의 파격은, 밑줄을 긋듯이 강조해서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 기대게 되는 방법은 말이 문법과 관습에 의해 배정받은 자리에서 ‘살짝’ 비켜나 있을 때, 그 어긋남의 이유와 효과를 밝히는 작업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신분석은 그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이다.
소설을 읽을 때의 정신분석은 곧 소설에 담을 수는 있지만, 소설 외부에도 내부에도 없는, 어떤 움직임을 추적하는 방법이다. 이 어떤 움직임을, 오랫동안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문학을 분석해온 프랑스 학자 장 벨맹 노엘은 ‘텍스트의 무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소설의 무의식은 결코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흔히 소설은 읽을 때 완성된다고 하지만, 소설은 독서가 아니라 비평이 개입해야만 형식과 의미를 얻어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무의식을 따라가며 글을 쓸 뿐, 그 작업에 형식을 부여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또다른 작업은 비평가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평가는 악보를 읽듯 소설을 연주해야 한다.
소설 연주하기
평론집에서 저자가 연주하는 소설들은 기존의 연구가 밝혀내지 못했던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가령 김승옥의 단편 「야행」에서 주인공 현주가 대낮에 낯선 사내에게 손을 잡혀 끌려가는 장면은, 그 표면과 달리 남근으로 변한 현주의 손목이 낯선 사내의 손에 의해 수음을 하는 장면으로 변주된다. 윤대녕의 단편 「남쪽 계단을 보라」에서 주인공 정명이 출근길에 얼핏 보았던,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지하철역의 남쪽 계단에 서 있던 여인은 ‘프리마베라(La primavera)’, 즉 봄에 등장하는 여신일 수도 있다.
이처럼 정신분석을 통해 소설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언어 자체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의식의 후미진 구석에 꽁꽁 숨어 있는 무의식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소설에서 언어 너머의 비언어적 세계가 드러날 때를 잡아야 한다. 육체의 감각과 기억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는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의 후미진 구석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무의식은 색깔로, 도구로, 혹은 계단이나 지하, 창문이나 샘물 같은 공간으로, 혹은 반복이나 순환, 대칭이나 함몰 같은 형태들로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에 대한 정신분석은, 소설이 그렇듯이, 언어를 떠나 이미지, 형태, 색, 소리, 외침, 혹은 춤이나 포즈 같은 육체 그 자체의 움직임까지도 따라가게 된다. 소설은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때 미술, 음악, 춤, 사진, 영화와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평론집에 미술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소설을 분석하면서 눈앞에 떠오른 그림들을 본문에 수록하였다. 소설과 미술이, 현실의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들을 만났을 때 드러내 보이는 불완전함을 서로 보족하는 황홀한 경험이 저자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완성되는 것은 소설의 무의식이 독자의 무의식을 만나서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무의식으로 지평을 열 때이다. 진정 작품이 악보를 닮은 것은, 음악이 그렇듯이, 문학작품 역시 헤아리기 쉽지 않은 깊이로 존재하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비평가는 연주자가 되어 이 층층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다시 돌아나와 그 경험을 들려주어야 한다. 오르페우스처럼.
작품의 의미는 작품 속에는 없다.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흔히 독서, 해석 등의 말로 지칭하는 작업들은 한 작품의 내용이 기대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내용도 그것에 의지하여 유사한 형식을 갖출 때 비로소 함께 움직이며 생성되는 의미를 만나는 것을 뜻한다. 정신분석은 이 만남을 표현하는 형식들 중 하나이다. 반복하자면 무의식은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언어체계다.
_‘책머리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