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에서 간결하고 정제된 이미지를 보여주었던 시인 윤희상이 칠 년 만에 두번째 시집 『소를 웃긴 꽃』을 펴냈다. 맑고 투명한 시어가 보여주는 시인의 담담한 시선은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아련한 추억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불러낸다.
‘거리’와 ‘사이’에서 불러오는 추억
그래도, 아이는 강둑에 서 있습니다.
강물은 오는 뱃길을 지우고,
가는 뱃길을 지웁니다
다시 돛단배는 오는 뱃길을 만들고,
가는 뱃길을 만듭니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풍경 밖으로 놀러 갑니다.
- 「영산강을 추억함」 중에서
시인은 지금 강가에 서 있다. 강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풍경과 나 사이를 흐르고 있는 강의 너비만큼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다. 그리고 시인의 시선 또한 꼭 그만큼 거리를 둔 채 대상을 향한다. 시집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강의 이미지, 강변의 이미지는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저 관조하는 시인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그 ‘거리사이’에서 멈추지 않고, 대상에 대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고 싶어하는 속내를 넌지시 내비친다.
내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와서
너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
나는 꿈꾼다
나와 너의 사이가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나와 너의 사이에서
또 바람이 불고, 덥거나, 춥다
- 「농담할 수 있는 거리」 중에서
그러나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은 ‘나’의 꿈에 불과하고, ‘너’와의 ‘거리-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여전히 ‘나’와 ‘너’의 사이에는 “바람이 불고, 덥거나, 춥다”고 읊조리는 시인의 나직한 음성은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시인은 ‘네 안에 있는 나’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 “내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오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네 안에 있는 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고, 따라서 대상과 함께 만드는 ‘거리-사이’는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다. 윤희상의 시에 결여와 부재의 분위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은 아마도 그 채워질 수 없는 ‘거리-사이’ 때문일 것이다. _박수연(문학평론가)
여전히 지울 수 없는 기억, 광주
시인에게 ‘1980년 5월의 광주’는 결코 ‘거리’를 둔 채 관찰자로서만 바라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만나려면/나를 만났던 사람들에게로 가야”만 하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벌써 죽은 사람이 있다”(「내게는 지금 내가 없다」). 1980년 5월 광주의 거리에 서 있던 사람들은 “총에 맞았기 때문에 죽었고”, “총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살았다”(「田榮鎭」). 그 생과 사의 갈림길은 그저 우연에 의한 것일 따름이다. 우연은 시인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으니 시인은 그저 “칼에 갇”혀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그 자리에서 그냥 주저앉아버”리는 수밖에 없다(「칼에 갇힌 사내」). 그 막막한 무력감 속에서도 시인은 “기억해야 된다고, 반드시 기억해야 된다고” 끊임없이 되뇌며 지금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토끼는 어디로 갔을까」).
언어라는 렌즈로 어루만지는 풍경
한결같이 말갛고 투명한 시어들은 시인의 관찰자적 시선이 차가운 무관심이 아닌 따뜻함과 여유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장도 숨김도 없는 언어가 그리는 담담한 풍경을 따라가다보면 읽는 이도 자연스럽게 풍경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이 시집은 바로 그 투명한 언어가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윤희상은 풍경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풍경을 긁는다. 그는 언어라는 렌즈로 풍경을 ‘트리밍’하지 않고 긁고 어루만진다. 가령 표제작인 「소를 웃긴 꽃」을 보라. 봄바람이 나목(裸木)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듯이, 시인의 고향 ‘나주벌판’에서 풀을 뜯는 소의 발바닥을 살짝 들어올리며 피는 꽃! 그 가녀린 힘이 소의 발바닥을 어루만진다. 그래서 시인은 “바람을 그리기 위해/바람을 그리지 않고/바람에 뒤척거리는 수선화를 그”(「화가」)린다. 일상과 고향과 죽음마저도, 그리고 가장 아픈 추억이었을 저 오월의 광주마저도, 그는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시는 시선이 멈춘 곳에서, 바람 같은 숨결로 우리의 내면을 간질이며 상처의 심연 속으로 이끈다. 삶은 그런 가려움을 감각할 때, 세상의 모든 문턱을 넘나들며 생동한다. 이 시집은 눈을 감고 읽어야 한다. _박형준(시인)
사과는 구른다. 비와 눈 사이로,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 사이로, 바그다드와 대한민국 사이로, 1980년과 2007년 사이로. 그리고 마침내 “나와 너의 사이”로 사과는 구르고 굴러 씨앗만 남는다. 사과의 속살은 아무도 먹지 못한다. 그건 ‘사이’로 사라져버렸으므로. 그는 사과를 굴리듯 말을 굴린다. “길이라는 말은 길이” 되고 “노을이라는 말은 노을이” 될 때까지 말은 구르고 굴러 마침내 뼈만 남는다. 말의 속살은 더 깊숙이 자기 안으로 숨어든다. 나는 뼈만 남은 말을 주머니에 넣고 덜그럭 소리가 날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그 안에 ‘꽃이 소를 들어올린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은 세계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면서. “풍경 밖으로 놀러” 간 아이가 어디로 사라졌을지 뒤늦게 궁금해하면서. 시집을 덮은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것뿐이었다. 집안을 뒤져 굴러다니는 연필을 모조리 찾아낸 다음 정성스럽게 깎는 것. 깎은 연필을 책상 위에 놓고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이 깎았는데도 그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말의 힘”으로 가는 기차를 상상해보았다. 하루 종일 글은 쓰지 않고 연필만 들여다보았다. _윤성희(소설가)
* 초판발행 | 2007년 6월 8일
* 128*288 | 108쪽 | 6,000원
* ISBN | 978-89-546-0303-4 03810
* 담당편집 | 조연주, 최유미(031-955-8865,3572)
나는 꿈꾼다
나와 너의 사이가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나와 너의 사이에서
또 바람이 불고, 덥거나,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