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시장의 왁자한 삶의 활기를 구성진 입담으로 들려주던 소설가 이명랑이 등단 십 년 만에 첫 소설집을 펴냈다. 1999년에 발표한 「미니 초코파이」를 제외하면 모두 2004년 이후에 발표된, 총 아홉 편의 단편들을 모은 것이다. 영등포시장의 소멸 속에서 작가가 새롭게 찾은 문학적 영토를 보여주는 이번 소설집은 이명랑 소설세계의 터닝 포인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등포시장, 소멸하다
이명랑은 처음으로 ‘영등포시장’을 문학공간으로 끄집어낸 소설가이다. 그녀의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 『삼오식당』 『나의 이복형제들』은 내용과 방식을 달리할 뿐, 모두 영등포시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영등포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영등포시장은, 실제 고향일 뿐만 아니라 문학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개발사업으로 재래시장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장의 위기’는 이명랑에게 있어 ‘소설의 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모두 빠져나가 텅 비어가는 영등포시장은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소설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소설집은 크게 ‘시장’을 다룬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로 나눠볼 수 있다.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챘다」와 「하현下弦」이 전자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챘다」의 주인공 ‘나’는 영등포시장에서 살다가 근처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 소설가이다. 변해가는 영등포시장에 대한 소설을 구상하던 ‘나’는, 소설의 구체화를 위해 1970~1980년대부터 영등포시장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고물장수 영식이 아저씨를 만난다. 하지만 영식이 아저씨는 시장의 변모보다 자신의 인생을 한 꺼풀 벗겨내기에 여념이 없고, 그 와중에 ‘나’는 죽은 정아 아버지 대신 기꺼이 정아네 가족의 삶을 등에 짊어지기를 택한 영식이 아저씨의 삶을 엿보게 된다. 「하현」에서는 오랜 방랑 끝에,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찾아갔던 식당으로 다시 돌아온 아들이 등장한다. 아이의 눈에 비쳤던 “어둠 속에서 불 밝히고 서 있는 그 식당은 더없이 아늑해 보였”지만, 오랜 세월 후에 다시 찾은 그곳에서는 “먼지와 바람만이 드나드는 빈집의 냄새”만 날 뿐이다. 재래시장이 사라지면서 살아 꿈틀거리던 식당의 활기도 소멸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식당 여자는 여전히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아들 또한 아비를 집어삼킨 바다로 다시 돌아왔다. 결국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챘다」에서 죽은 자의 삶 뒤에 자신의 삶을 이어붙인 영식이 아저씨나 그런 영식이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 「하현」에서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식당 여자와 다시 돌아온 아들은, 시장의 소멸을 등지는 대신 오히려 그 소멸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냉혹한 세상으로 화해의 손을 내민 사람들
시장이 사라지면서 왁자하던 활기도 함께 빠져나가버린 탓일까.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무겁다. 주인공은 아기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조차 버림받자 방에 처박혀 세상과 절연하고(「미니 초코파이」), 남편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후로 자신을 쫓아내려 하는 작은처와 아들들에게 대신 복수해주기를 바라며 밤마다 고등어를 들고 도둑고양이들을 찾아다닌다(「고양이가 간다」). 또한 태국의 소수부족과 우리 민족 간의 유사성을 연구하다가 이름난 논술강사로 전향해버린 전남편의 논문 주제로 여봐란 듯이 책을 내기 위해 태국까지 건너가지만 무너져가는 소수부족들의 전통을 확인할 뿐이다(「널래 날래 까우리로 까이라?」). 자본주의의 논리로 재래시장들을 밖으로 내몰았던 세상은, 상처받은 인물들이 내미는 손마저 매몰차게 뿌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소설집에서 궁극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비열한 세상을 향한 ‘적의’가 아니라, 그러한 세상과의 ‘화해’와 ‘용서’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신체적, 정신적으로 왜소하지만, 불치병으로 몸이 뒤틀린 채 죽은 도련님에게도 생의 의지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차가워진 몸을 주물러주고(「사령死靈」), 유년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글로 적어내거나 구슬을 꿰는가 하면(「그림 앞의 장미와 꽃병」), 숨길 수 없는 화냥기로 자신의 유년을 얼룩지운 어머니를 용서(「연이 떴다」)한다. 그리고 이들을 화해와 용서로 이끄는 것은 바로 생의 의지이다. 작가 이명랑이 우울과 무거움 속에서 캐내고자 했던 것은 또다시 생의 의지인 것이다. 또하나, 이번 소설집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문체이다. 작가가 그 동안 발표해온 장편들이 서사에 무게를 실었다고 한다면, 이번 소설집은 시적인 이미지를 끌어온 「그림 앞의 장미와 꽃병」에서 볼 수 있듯이 문체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노력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서사를 놓지 않았으니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헛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명랑이 등단하면서부터 천착해온 소설은 결국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제목 ‘입술’은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이 저 ‘삼인칭의 세계’에서 만날 수많은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작가의 새로운 각오이기도 하다. 그 멀고먼 길 앞에 선 이명랑의 행보가 기대된다.
새로운 문학적 영토를 찾아서
무엇이든 끌어안기 위해 누구는 기도를 하고, 누구는 “용서”와 “감사합니다”를 되풀이한다면, 나에게는 글쓰기가 있습니다. 왜 쓰는지 더는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야말로 저 ‘삼인칭의 세계’로 나는 곧장 걸어갈 것입니다. 짐은 벌써 다 꾸렸습니다. _‘작가의 말’에서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상인들은 시장에서 쫓겨나고, 영등포시장의 작가 이명랑 역시 그곳에서 추방된다. 이제 작가 이명랑은 새로운 문학적 영토를 찾아서 탐색을 시작한다.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문학적 영토는 어디일까? 그녀의 시선은 영등포시장 옆에 자리한 아파트 단지에서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 태국의 치앙라이까지 건너가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작품들에서는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돌고 있는 인물들을 그리기도 한다. 자신의 새로운 문학적 영토가 발견되는 순간까지 그녀의 탐색이 계속될 것이며, 작품집 『입술』은 이 년여에 걸친 탐색의 결과인 셈이다. _김종욱(문학평론가)
* 2007년 4월 23일 발행
* ISBN 89-546-0304-1 03810
* 신국판 | 312쪽 | 9,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고경화(031-955-8865, 3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