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일본 문단에서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고수하며 묵묵한 집필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마루야마 겐지. 그가 데뷔 삼십 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써낸 장편소설 『천 일의 유리』는 일반적인 소설의 형식을 무너뜨리는 과감한 시도가 돋보이는 대작이다. 1, 2권 총 천 페이지의 분량인 이 소설에서 작가는 한 페이지당 하루의 이야기를 날마다 시점을 달리하며 전개해나간다. 천 가지 시점이 그려내는 천 일 동안의 이야기가 때로는 고요한 호숫가의 물결처럼 잔잔하게, 때로는 격랑에 휘몰아치며 독자를 맞이한다.
한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둘러싸고 삼라만상이 연주하는 장대한 심포니
소설의 커다란 줄기를 이루는 것은,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지에 위치한 마호로 마을의 언덕 위 외딴집에 살고 있는 소년 요이치의 짧은 생애이다. “마비된 뇌 탓에 제멋대로 춤추는 육체를 지녔으며 절반은 서글프고 절반은 우스꽝스런 동작으로 낮에는 빛을 밤에는 어둠을 휘저으며 도처에 타원형 은하 같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는”이란 묘사처럼, 그는 선천적인 장애로 인해 정신과 육체가 모두 부자유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의 혼은 마호로 마을 사람 그 누구보다도 자연과 가깝게 소통하며 세상의 진리를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으며, 자신이 주워와 기르는 푸른 깃털의 큰유리새와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다. 모든 시점의 중심에 놓여 있는 소년 요이치의 자유로운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면, 좁은 마을 안에서 아옹다옹하며 실리와 이속을 챙기기 위해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1987년~1989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천황이 죽고 새로운 천황이 즉위하여 연호가 바뀐 격동기로, 전쟁 당시 마치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로 받들어졌던 천황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면서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뒤흔들어놓았다. 강과 호수, 산 등 대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마호로 마을은 언뜻 속세와 연관이 없는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그런 혼탁한 시대의 영향권에서 결코 벗어나 있지 않다. 읍사무소 직원으로 정년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연애소설에만 빠져 살다가 처음으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 누나 등, 그를 애물단지로 여기는 가족 역시 평생 똑같은 일만 하며 살아야 하는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일상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다가 결국 허무한 좌절을 맛보고야 만다. 그 외에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연연해하는 전직 대학교수, 우연히 야생 대마를 발견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젊은 연인, 휴양지 개발 계획으로 대립하는 기업과 마을 사람들, 퇴락한 여가수와 작부, 정체불명의 폭력단 조직원들과 파계한 수행승 등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질서, 도덕성의 상실로 방황하는 인물들이 작품 곳곳에 등장해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퍼즐처럼 맞춰나간다. 사물, 동물, 관념, 감정 등 이 세계를 구성하는 유형무형의 온갖 요소들이 서로 뒤섞여 환상적인 페럴렐 월드를 구성하면서, 현실 속 인간사회의 모순을 조금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방대한 분량과 형식적 실험성에서 다가오는 강렬한 인상 외에도 『천 일의 유리』는 지금껏 작가가 일관되게 지켜온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주제의식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단어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타페스트리처럼 촘촘하게 짜여진 문장은 때로 유머러스한 풍자를 곁들이는 여유를 보이며, 헛된 집착과 욕망의 포로가 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능력함을 노래한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가능성은 아직 존재한다”며 매일 꾸준히 열 장 이상의 원고지를 채워나가고 있다는 작가의 도전적인 의욕과 역량을 느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근자에 마루야마 겐지는 인간 이외의 다양한 시점을 빌려, 현대 문명이나 인간사회의 모순, 황폐함을 파헤치는 형식의 소설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이외의 시점을 특권적인 위치에 올려놓거나, 주인공 인물을 무상으로 방면하는 안이한 발상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이 가차없이 비판당하고, 위기에 처하고, 살해당하고, 바보 취급을 당한다. 상당히 엄격한 비판 정신으로 관철돼 있다. 작가 자신조차 궁지에 몰아넣는 스토이시즘이 느껴진다. _오가사하라 겐지(문예평론가) 천 일 동안 천 가지 시각으로 펼쳐지는 ‘마호로 마을’의 일상 역시 세월과 더불어 변화하고 크고 작은 일에 일희일우하는 우리네 인간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이는 몸이 아파 삶이 무겁고, 어떤 이는 사랑을 얻지 못해 삶이 서럽고, 어떤 이는 복수심이 들끓어 삶이 핏빛이고, 어떤 이는 물욕에만 눈이 어두워 삶이 불만스럽습니다. 또 어떤 이는 혼자 잠드는 밤의 외로움에 몸을 뒤척이고, 어떤 이는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어떤 이는 첫사랑의 황홀경에 이성을 잃고, 어떤 이는 지난 영예를 회복하려 아등바등하고, 어떤 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고요한 행복을 누립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네 삶의 고리가 완성되지 않는 것처럼 마호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마호로 마을이란 환영의, 또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나갑니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마루야마 겐지 丸山健二
1966년 「여름의 흐름」으로 『문학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스물세 살의 나이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37년 동안 최연소 수상자라는 영예를 누렸다. 일본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특출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일본 중부의 고산지대인 나가노 현 아즈미노에 거주하며 창작과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물의 가족』 『천 일의 유리』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천 년 동안에』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도망치는 자의 노래』, 소설집 『어두운 여울의 빛남』 『아프리카의 달빛』 『달에 울다』 『낙뢰의 여로』, 산문집 『아직 만나지 못한 작가에게』 『소설가의 각오』 등이 있다.
옮긴이 김난주
1958년 부산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 수료 후, 쇼와 여자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오쓰마 여자대학과 도쿄 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하였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 『노르웨이의 숲』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천 년 동안에』 『소설가의 각오』 『창가의 토토』 『키친』 『N·P』 『아르헨티나 할머니』 『반짝반짝 빛나는』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겐지 이야기』 등이 있다.
* 2007년 4월 4일 발행
* ISBN 1권 978-89-546-0299-0 04830 2권 978-89-546-0300-3 04830 세트 978-89-546-0301-0
* 153*224 | 1권 506쪽, 2권 508쪽 | 각권 11,000원
* 담당편집 : 양수현(031-955-8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