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의 유구한 전통과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의 만남
유고슬라비아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세르비아 시인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이 출간됐다. 그동안 세계문학을 주도해온 힘센 언어들에 밀려 국내에 소개될 기회가 적었던 유고슬라비아 문학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에 포파의 대표작「작은 상자」외 몇 편의 시가 번역, 소개된 적은 있지만, 시집으로 선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시집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미국 시인 찰스 시믹이 번역한 영역본 선집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찰스 시믹은 포파 시의 가장 이상적인 번역자로 알려져 있다.
이 시집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충격적인 이미지는 세상을 긍정의 눈빛으로 응시하는 새로운 초현실주의의 얼굴이다. 포파는 세르비아 전래시가의 토속적 리듬과 전래 수수께끼, 민담 등을 시에 녹임으로써 서유럽 초현실주의 시와 차별성을 보이는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시의 진경을 보여준다.
총 11부로 구성된 이 시집은 포파가 추구한 경향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1부 ‘작은 상자’에서 제7부 ‘하늘의 반지’에 이르는 연작시들은 전기에 속하는 작품들로 자아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주목하고 있고, 제8부 ‘성(聖) 사바의 봄’에서 제11부 ‘『생살』에서’에 이르는 시편들에서는 세르비아의 부족신인 늑대를 주요 소재로 세르비아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화려했던 과거사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고 있다.
오래된 은유의 숲에서 찾아낸 수수께끼의 언어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시대 작가들이 세르비아 문학의 돌파구를 서구 문학에서 찾으려 했던 반면 바스코 포파는 세르비아의 전통에서 가장 세르비아적인 문학의 모범을 찾으려 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포파는 시의 제목이 정답이 되고 시의 본문이 질문이 되는 수수께끼의 형식을 차용한다.
그것은 머리도 팔다리도 없이
나타난다
호시탐탐 미친 맥박으로
시간의 뻔뻔스런 발걸음과 더불어
움직인다
정열적으로 모든 것을 껴안아
움켜쥔다
달의 눈썹으로 미소 짓고 있는
하얗게 반들거리는 처녀 시체
―「흰 조약돌」전문
제목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조약돌을 소재로 한 작품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소재와 주제 사이의 연관성이 희박해 보인다. 이 둘을 연관시켜 의미를 창출해내는 것은 상상력의 힘이다. “달의 눈썹으로 미소 짓고 있는/ 하얗게 반들거리는 처녀 시체”라는 표현은 조약돌의 이미지와 거리가 먼 듯 느껴지지만, 사실은 관습적인 언어의 굴레를 벗어난 자아가 능동적으로 꿰뚫은 사물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첫 시집 『껍질』에 수록된 시는 대부분 이러한 형식을 띠고 있다. 가령, 「민들레」라는 작품에서 포파는 다음과 같이 민들레를 은유한다. ‘길가에 앉아서/ 이 세상의 끝을 응시하는/ 외로움의 노란 눈동자.’ 그렇다면 다음 시의 제목은 무엇일까. ‘그는/ 보통 다리가 여덟이다.’ 정답은 「말」이다. 포파는 수수께끼의 재미를 살리면서 말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역동적인 이미지로 간결하게 표현한다.
세르비아 부족신화에서 길어올린 원시적 생명의 찬가
세르비아 부족신화에서 늑대는 숭배와 경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세르비아인들이 늑대의 전사적 기질을 동경한 까닭도 있지만, 죽은 자의 영혼이 늑대로 부활한다는 믿음이 민간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코소보 평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늑대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는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 크리스마스에 젊은이들이 늑대로 변장하거나 늑대의 허수아비를 가지고 집집마다 도는 풍습의 연원이 여기에 있다.
그의 시는 부재와 현존, 삶과 죽음 사이의 팽팽한 긴장 가운데 존재한다.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출구는 부족신화에 토대를 둔 원시적 생명성이다. 늑대는 시적 화자의 먼 조상이면서 동시에 현존하는 자아다.
그러나 이 늑대는 지금 “절름발이 늑대”이다. 이 세계는 원시적 생명의 충만한 발현을 허락하지 않는다. 죽음의 절대 폭력과 싸우는 자는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
암늑대가 살아 있는 한, 할머니는
리넨 천 같은 왈라키아 발음으로
나를 작은 늑대라고 부를 것이다
늑대는 나에게 비밀스레
날고기를 먹였고 나는 성장하여
언젠가 무리들을 이끌 것이었다
나는 내 눈이
어둠 속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할 것을
믿었다
―「늑대의 눈」중에서
포파 시의 미덕은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세계를 엿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놀라움과 재미와 거북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익숙지 않기 때문에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게 된다. 사물의 의미나 가치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느낌과 상상력의 성능에 따라 거의 무한하다는 깨우침을 새삼스럽게 얻으면서. _정현종(시인)
포파가 다른 모더니스트들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가 파편화된 삶이 아닌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와 신화를 끌어들임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적 관계와 유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_오민석(시인, 문학평론가)
지은이 _바스코 포파Vasco Popa
현대 유고슬라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 1922년 세르비아 브르샤츠 지방의 작은 마을 그레베나츠에서 태어났다. 베오그라드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랑스 초현실주의를 접했다. 1945년 유고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수립과 더불어 문학계 전반에 문학의 정치적 도구 역할이 강조되자 표현의 자유와 문학의 순수가치를 주장하며 독자적 시 양식을 확립했다. 세르비아의 전래 수수께끼, 주문, 잠언, 자장가 등에서 시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뽑아 탄생한 첫 시집『껍질』은 그 혁신성과 실험성으로 전후 유고슬라비아 초현실주의 문학의 신호탄으로 평가받는다. 1991년 타계하기까지 총 여덟 권의 시집과 세르비아 전래시가와 민담 등을 엮은 에세이를 펴낸 그는 모든 작품을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썼고, 신화와 전통이라는 인류의 공통 관심사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문학이 국지적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문화권에서도 공감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68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수여하는 유럽문학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_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단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저서로 시집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인물이야기 『세상을 지도 안에, 김정호』 『씨앗은 우주다, 우장춘』 등이 있다.
* 2006년 12월 22일 발행
* ISBN 89-546-0243-6 03890
* 128 * 188 | 224쪽 | 8,500원
* 담당편집 : 이현자, 강건모 (031-955-2634)
말의 억압을 뚫고 솟아오른 초현실주의적 상상력!
오래된 은유의 숲에서 찾아낸 수수께끼의 언어,
세르비아 부족신화에서 길어올린 원시적 생명의 찬가……
유고슬라비아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