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민의 첫 시집 『상실』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불온성을 이유로 판금되어 세상에 없어졌던 시집이 삼십 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시인의 시를 기다려왔던 이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파경 직전의 완벽한 거울
그대 눈 속 깊이 타는 불
아주 조그만 꽃이파리 하나
뒤틀리며 불꽃이 되는 아픔 같은
숨어버린 넋의 안쓰러움
스스로를 사랑하기에는 거칠고
그대 껴안아 바라보기는 외로워라
―「서시」 전문
시인 김정환은 「서시」를 가리켜 “균열과 파경 직전의 거울” 같다고 말했다. 파경 직전의 거울은 완벽하지만 불안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더욱 치열한 감동을 가져온다. 「서시」 또한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 안에는 파경 직전의 거울처럼 불안한 떨림이 도사리고 있다.
시인은 「서시」에서 앞으로 닥칠 파경을 예감했던 것일까. 1975년 민음사에서 나온 『상실』은 ‘불온성’을 이유로 판금되었고, 그후 시인은 지난해 『어느 날 꿈에』(창비, 2005)를 내기까지 삼십 년간 시집을 내지 않았다.
한 정직한 시인의 젊은 넋의 자서(自敍)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과정에는 언제나 괴로운 성장통이 뒤따른다. 『상실』에서 주로 발견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성장통의 고통과 정체성 찾기의 어려움이다. 젊은 ‘나’는 어른이 되는 길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민하고 방황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것 이외엔 모두/알고 있”(「나는 모른다」)는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더구나 내가 서 있는 사회는 “지금 살아/움실거리는 구데기들”(「저녁식사중의 확인」)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나’는 참다운 ‘나’를 찾아 이 더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무작정 떠난다. 그러나 “떠나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잊어버리려고 연애를/하지만 내 목마름의 창문이 항상 불타고 있다”(「바람」)는 고백처럼 여행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젊은 날의 충동적인 여행은 그저 “싸움을 피해 영창을 피해 고문을 피해 죽음을 피해 도망다니는 길”(「여행」)에 불과하다. ‘나’의 눈은 점점 나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 주변으로 향한다. “훤히 동터오는 네거리로”(「노래」) 가자고 노래하는 ‘나’에게서 우리는 목적 없는 방황에서 벗어나 한층 성숙해진 젊은 넋의 자서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서 최민이란 한 정직한 시인의 정신의 자서(自敍)를 엮어낼 수 있다. 그것은 그저 떠나고 싶어서 떠나보는 여행의 도상에서 참다운 여행이란 한 가지뿐이며 그것은 인간으로의 여행이며 회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집약될 수 있는 젊은 넋의 자서(自敍)이다. 혼자 가는 길은 결코 “훤히 동터오는 네거리”로 통할 수 없으며 출발은 필연적으로 복수의 그것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도 중요한 경험으로 제시되어 있다. _유종호(문학평론가)
최민 시집 『상실』의 복간으로 현대문학사의 빠진 이빨 하나를 다시 심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뜯어고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저질러졌고, 대단하게 저질러졌다. 하지만, 시집 『상실』은 부단히 그 저질러진 문학의 방향을 교정해야 한다고, 했어야 한다고, 조용히, 그러나 치열한 문학성으로, 절규로 속삭이고, 속삭임으로 절규할 것이다. _김정환(시인)
*2006년 12월 20일 발행
* ISBN 89-546-0254-1 02810
* 121*186 | 144쪽 | 7,0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고경화(031-955-8865, 3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