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이문이 『눈에 덮인 찰스 강변』 『나비의 꿈』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 『공백의 울림』 등 지금껏 발표한 네 권의 시집에서 추려낸 시들을 묶은 시선집. 1955년 등단 이후 이화여대, 서울대, 포항공대 등의 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불문학자이자 철학자로 더욱 잘 알려진 시인이 객지 보스톤에서 생활하며 써낸 시들이 대부분이다. 흩날리는 눈발 너머로 본 이국의 풍경과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돋보이는 시편들이 읽는이를 아득한 공백의 세계로 인도한다.
보이지 않는 실재의 세계와의 조우
눈이 닿는 곳마다
눈에 파묻혔다
크나큰
시가 씌어지길 기다리는
한 장의 흰 원고지
무슨 시를 쓰랴
바람과 해와
바다와 별과
시를 쓰리
언어 아닌 구름으로
―「눈에 덮인 들」 전문
눈 덮인 길을 나아가며 발자국을 내는 것은 시인이 흰 백지 위에 문자로 시를 채워나가는 행위와 동일시할 수 있다. 박이문 시인은 “시인이 되는 것이 일찍부터의 나의 꿈이었고, 내가 철학공부를 하게 된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가 내가 왜 시에 집착을 하는가, 시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좋은 시인가를 알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정서적 표현에 대한 욕망보다 세상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알려는 지적 갈증이 앞서” 시인보다 철학자의 길을 택했지만, 끝내 버릴 수 없었던 시에 대한 꿈은 마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의 그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그의 시에는 유난히 ‘고향’과 ‘어머니’,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무덤’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나의 무덤은 문패도 없다/나는 버러지의 살이 되고/잡초들의 색깔이 되고/들꽃의 향기가 된다”(「무명묘(無名墓)」), “하늘 지붕 밑/흙 이불 덮고/버러지와 더불어”(「비석(碑石)」), “잠들지 않는 밤/무덤 깊은 곳에서 우는/벌레 소리를 듣는다”(「잠들지 않는 밤」), 그 외 「마운트 오번 공동묘지」, 「미국 케임브리지 시 공동묘지」 「비석들」 「어머님의 무덤 앞에서」 등의 시들이 실질적 의미로서의 무덤을 주제로 한 시들이다. 시인은 삶과 죽음이라는 영원한 주제와 함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면서, “죽음 다음/또하나의 삶이/또하나의 삶 다음/또하나의 죽음이”(「크나큰 하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크나큰 하나”의 세계를 꿈꾼다. 이러한 성찰은 이국의 공동묘지 앞에서 “그래도 나는 손님/삼십 년이 지나도 이곳은 나의 객지”(「마운트 오번 공동묘지」)라며 이방인으로서의 자아를 실감하거나, “당신의 무덤에/무신론자 당신의 아들이/당신의 영혼을 찾아왔습니다”(「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하고 죽은 이의 영혼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 등으로 이어지며, 결국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절대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시적 탐구의 의지”로 귀결된다.
언제 가까이 갈 수 있을까
너무 멀다
아니면
무한한 공백이다
―「갈 곳」 전문
그 길이 아무리 멀지라도 ‘갈 곳’이 있기 때문에 시인은 행복할 수 있다. ‘갈 곳’이 너무 멀게 느껴져 주저앉고 싶거나, ‘무한한 공백’의 두려움이 엄습하더라도 그 두려움은 오히려 의지를 새롭게 추스릴 수 있는 계기일 수 있다. ‘갈 곳’이 시인의 근원적인 고향이라면,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는 귀향연습으로서의 시 쓰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시인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_오생근(문학평론가)
유한한 삶의 무의미성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
박이문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순진성 혹은 순정성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다. 그의 시적 언어는 복잡하기보다 단순하고, 난해하기보다 명징하며, 의식적인 기교에 의존하기보다 순수하고 담백한 마음의 표현에 더 큰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나 존재론적 사유를 주제로 한 시에서도 어려운 추상언어를 동원하지 않고, 추론이 불가능한 이미지를 중첩시키지도 않는다. 시인보다 철학자로 유명한 그의 작품세계에서 이와 같은 현상은 일견, 의외인 것처럼 여겨진다. 더욱이 그가 프랑스 시인들 중에서 시의 해석이 가장 어려운 시인으로 손꼽히는 말라르메의 시로 박사논문을 쓴 불문학자였음을 염두에 두면 그 의외의 느낌은 놀라움에 가까워진다. 물론 그의 시에서 이렇게 선명히 비쳐지는 특징들은 깊은 철학적 사색을 동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그의 시와 철학의 관계를 밝히기보다 불문학자이자 철학자인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근원적 힘은 무엇일까를 탐색하는 방향에서 출발한다.
_오생근(문학평론가)
* 2006년 11월 25일 발행
* ISBN 89-546-0239-8 02810
* 121*186 | 156쪽 | 7,0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양수현(031-955-8865, 8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