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등단 이래 소설집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 『라벤더 향기』 『비밀』, 장편소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온 서하진의 다섯번째 소설집 『요트』가 출간되었다. 『요트』에는 표제작 「요트」를 비롯해 「퍼즐」 「농담」 등 매끈한 일상 아래 숨겨진 삶의 비의를 다룬 단편 여섯 편이 실렸다.
‘무풍지대’ 아래 숨겨진 불안의 요소들
표제작 「요트」의 주인공은 출판사에 근무하는 중산층 여성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의 재개발이 확정되어 집값이 갑자기 20억으로 뛰었다. 철없는 남편은 아파트를 팔아서 요트를 사자고 조른다. 강북에 같은 평수의 아파트를 사면 남는 돈으로 충분히 요트를 살 수 있다는 것. 3호선 전철이 닿는 강남에서 버틴 험한 세월을 되새겨보면 강북으로 옮긴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 조금만 지나면 강남에 59평 아파트를 갖게 되는데 말이다. 남편의 고집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방랑가 기질이 있는 남편의 친구가 요트 여행의 매력을 늘어놓으며 자꾸만 남편을 꼬드긴다. 그 친구가 말하는 요트 여행의 매력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바다 한가운데서 빨래를 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가루비누를 풀고 물에 담그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물망에 빨래를 넣는다, 그물을 배의 이물에 묶는다, 그물을 던진다, 그런 순이지요. 빨래거리가 담긴 그물은 배의 꼬리에 매달려 따라옵니다. 배는 달리고 물살이 그물 속속들이, 섬유에 밴 땀내 속까지 파고듭니다. 얼마 후 그물을 건져내고 옷을 꺼내 뱃전에 널어둡니다. 바짝 마른 옷을 털면 하얀 소금가루가, 햇빛에 반짝이며 떨어진다나요?”(17~18쪽)
고3인 아들의 입시문제와 지금 누리는 안정을 생각하며 요트가 주는 환상을 애써 부정하는 주인공. 그러던 어느 날 모범생 아들이 가출한다. 아들 때문에 꾸려왔던 모든 삶이, 중산층의 평온한 일상이 일순간에 무너진다. 고생 끝에 찾은 아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고, 고민하던 주인공은 아들에게 요트를 타보지 않겠냐고 권한다. 20억짜리 아파트가 중산층의 안정이라면 요트는 안정을 위해 희생한 꿈과 모험을 의미한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정을 구축하는 이유이자 목적인 아들이 가출하고 나자, 중산층의 안정이란 것은 껍데기에 불과해진다.
무풍지대라고 알아요? 바람이, 파도가 전혀 없는 지역이지요. 바다는 대리석처럼 고요히 굳어 있고 공기는 전혀 움직임이 없어요. 숨을 쉬는가, 내가 살아 있는가 싶어질 만큼 사방은 적막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거예요. 그럴 때 가장 두려워요. 영영 바람이 불지 않고, 닻을 올릴 수 없고 그곳에 갇혀 말라갈 것 같은 두려움이지요. 파도가, 바람이 두려운 게 아니에요. ―「요트」 중에서
가족 안에 자리잡은 폭력적 논리와 균열
「요트」가 안정적으로 보이는 일상에 자리잡은 불안과 잃어버린 꿈에 대한 이야기라면 「퍼즐」과 「농담」,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도」는 가족 안에 숨겨진 폭력적 논리와 균열을 이야기한다. 「퍼즐」의 주인공 지은은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남편이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한다고 덜컥 사표를 낸 후,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내핍의 흔적만큼은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그녀도 결국 옛 남자친구에게 사기당한 돈을 처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게 된다.
「농담」의 희수는 3년 동안 한 직장에 다녀도 “희정씨, 민정씨, 아니 희연씨”로 불릴 만큼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해온 그녀는 이제 의상디자이너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사표를 낸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은 가출을 감행하고, 언제 들어올 거냐는 희수의 물음에 “네가 뭘 잘못했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할 뿐이다. “대출받은 전세금과 불입이 끝나지 않은 적금 같은 사소하고도 중요한 것들”(101쪽) 때문에 그는 아내의 꿈을 인정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가도」의 주인공은 시인이다. 그녀의 남편은 오래도록 변절하지 않은 운동권 출신으로 해맑고 순수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고 조금씩 지쳐갈 때쯤 뉴질랜드에 있는 누이로부터 이민 제의를 받는다. 아이와 남편을 먼저 뉴질랜드로 보내놓은 그녀는 자신의 초청장의 유효기간이 다해갈 때까지 남편과 아이가 있는 뉴질랜드로 떠날 것인지 모국어로 노래할 수 있는 한국에 남을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스위스 출신의 패트릭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너를 가두고 있어. (……) 너를 가두는 게 뭔지 너는 몰라. 나도 알지 못하지. 그렇지만 느껴져.”(252쪽)
옛 남자의 눈빛에 잠시 흔들렸던 지은도, 꿈을 좇으려는 희수도 가족과 일상이 쳐놓은 견고하지만 낮은 ‘목책’을 결코 훌쩍 뛰어넘지 못한다. 서하진의 인물들은 언제나 가족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면을 쓰고 분열된 자아를 추슬러야 하는 그들은 ‘시간이 흘러가도’ 되풀이해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금지’에 대한 그들의 애매한 태도들이 그들을 부유하게 한다.
서하진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가족’을 말한다. 지나간 언제인가 행복했던 부부들의 유리파편 같은 일상들, 매끈한 일상의 안쪽에 깃들어 있는 폭력의 논리들, 일상에 의해 은폐된 사라진 꿈에 대한 열망들, 권위적인 아버지에게서 속물적인 남편에게로 인계되는 수인(囚人)들의 절망들. 서하진은 이것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가족-일상의 이야기를 새로운 판본으로 다시 쓴다. 이를 통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한’ 일상, 바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악몽인 그들의 존재감을 돋을새김하고, 자기 변명이나 폭로의 형식을 취하는 식의 ‘상식’과 ‘편견’에 붙들리지 않고 ‘소시민’ 혹은 ‘중산층’으로 지칭되었던 존재들의 다층적인 결을 살려낸다. ―소영현(문학평론가)
수록작품 발표지면
요트 ………………………………………… 『문학과사회』 2005년 가을호
비망록(備忘錄), 비망록(悲忘錄) ……… 『세계의문학』 2005년 봄호
농담 ………………………………………… 『문학·판』 2004년 여름호
꿈 …………………………………………… 『현대문학』 2006년 1월호
퍼즐 ………………………………………… 『현대문학』 2005년 2월호
시간이 흘러가도 ………………………… 『문학사상』 2004년 11월호
* 2006년 11월 11일 발행
* ISBN 89-546-0235-5 03810
* 신국판 | 288쪽 | 9,8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김송은(031-955-8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