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최순덕 성령충만기』(문학과지성사)를 펴내며 일약 우리 문단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오른 젊은 작가 이기호의 두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출간되었다. 표제작을 비롯해 그간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여덟 편의 옹골찬 단편들을 한데 묶었다. 첫 소설집에서 낯선 화법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동시대 인간 군상들의 비루한 삶의 모습을 깊이 있는 웃음으로 버무려낸 바 있는 작가는 이번에는 소설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물씬 배어 있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소설과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은 당차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재미와 흡인력 또한 그가 걸출한 이야기꾼임을 다시 한번 유감없이 보여준다.
소설가, 소설을 생각하다
이기호의 소설은 무엇보다 소설의 본질인 ‘이야기’에 충실하며 작가(화자)와 독자(청자)의 거리 좁히기에 힘쓴다. 이기호의 이러한 작업이 값진 것은 그것이 소설을 현실과 당당히 경쟁하게 만들고 현실 속으로 좀더 깊이 파고들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술자이자 작가인 화자가 당신이자 독자인 청자에게 최면을 유도하고 최면에 걸린 청자가 변태 취급을 받아가며 여관방에서 콜걸에게 소설을 읽어준다는 독특한 발상의 「나쁜 소설―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는 이기호의 ‘친(親)독자적’ 소설관을 집약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편 이기호의 소설가관은 별볼일없는 소설가가 원자력 발전소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보문고를 뒤덮은 이십오 미터 시멘트벽을 곡괭이 하나로 뚫고 들어간다는 내용의 「수인囚人」에 잘 표출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소설가는 자신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곡괭이질을 하지만 정작 그의 생존을 담보하는 것은 바로 그 곡괭이가 상징하는 그의 노동력이다.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것은 소설가를 만드는 것은 소설가이고자 하는 ‘의지’이므로 소설가는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라는 색다른 관점이다.
낙오자들의 깊은 밤 로망스
이기호가 탄생시켜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통해 그 이름을 널리 알린 ‘시봉이’는 이번 소설집에서 애처롭기 짝이 없는 뒷골목 낙오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시골에서 상경해 고시원에 거주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하다 부잣집 딸의 차에 뛰어들어 한몫 잡아보자 마음먹지만 어린 불량배들에게 흠씬 얻어터지고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을 뿐이고(「당신이 잠든 밤에」) 아르바이트로 한밤중에 국기를 수거하던 어느 날, 밤마다 국기게양대와 ‘사랑을 나누는’ 남자, 떠나간 아내를 찾아 국기게양대 밑을 어슬렁거리는 또다른 남자와 나란히 세 개의 국기게양대에 매달려 청승을 떠는 가관을 연출하는 것이 고작이다(「국기게양대 로망스―당신이 잠든 밤에 2」). 국가의 혜택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인물들이 국기게양대에 매달려 혹시나 자신들의 행위가 국보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광경은 우리 시대 수많은 시봉이들의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기호는 역시 그러한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역사를 잊지 마세요!
간첩이 무서워 아버지가 파놓은 지하벙커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처음 흙을 먹게 된 소년이 급기야는 간첩에 유괴범 혐의까지 뒤집어쓰고 땅 속에서 끌려나온다는 황당한 설정의 이야기(「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는 요리 프로그램의 멘트를 떠올리게 하는 서술 방법도 독특하지만 이기호의 ‘개념 잡힌’ 역사의식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분단체제의 모순과 그러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겪게 되는 억압을 상징적이고 구조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어린 조카를 본의 아니게 죽게 만든 할머니를 위해 벌이는 한 편의 독특한 굿판 같은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에라이, 뿅! 같은 소설의 역사
어린 시절 작가 박경리 선생과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주인공이 어느 날 ‘토지’라는 룸살롱을 차린 친구로부터 박경리 선생에게 상호 사용 승인권을 받아오라는 협박을 받고 난감해하다가 결국에는 거액의 술값만 물게 되거나(「원주통신」), 집단 린치의 쓰라린 고통 속에서 당구장 이층에서 뛰어내리기도 서슴지 않았던 주인공이 틈틈이 시도 뭣도 아닌 글을 끼적거리며 소설가로 성장해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서 제목을 따오며 소설 한 편을 완성시키는(「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내용의 소설들에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진하게 배어 있으며 이기호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녹아 있다. 그 유쾌함 속에 ‘소설이란 무엇인가’와 ‘소설가란 누구인가’에 대한 진지한 의문과 대답이 담겨 있음도 물론이다.
나는 에라이, 뿅! 만큼 살았으니, 에라이, 뿅! 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겐 리얼리즘이었으니까. 그것이 내 태생이었으니까.(「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단 한 권, 그것도 첫 소설집으로 한국문학의 밝은 미래를 예감케 하는 작가라는 이름을 얻은 이기호. 그의 두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그가 바로 한국문학의 밝은 미래임을 증명하는 책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제 이기호의 소설은 이기호의 소설 그 자체로 읽힐 때가 되었다
그의 소설은 앞선 세대가 공유했던 그 숱한 절망과 고통, 그리고 보편적 주제를 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앞선 세대와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기호 소설이 파괴력이 높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즉 그의 소설이 유달리 혁신적인 소설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전세대와 다른 삶의 징후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다루어져오던 그 징후들을 영원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길항시켰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이기호의 소설은 먼저 이기호의 소설 그 자체로 읽힐 때가 되었다. 류보선(문학평론가)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 아이러니의 소설공학은 2000년대 문학이 선사하는 여러 유쾌함들 중에서도 가장 ‘개념 있는’ 유쾌함 중의 하나다. 그 아이러니의 저의(底意)가 대부분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최근 젊은 작가들에게서 다양하게 복제 혹은 변주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이러니의 ‘원천기술’은 그에게 있는 것 같다. 조롱과 연민 혹은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우리 이럴 줄 알았다. 신형철(문학평론가)
* 초판 발행 | 2006년 10월 13일
* ISBN 89-546-0228-2 03810
* 145*210 | 328쪽 | 9,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김송은, 오경철(031-955-8865, 8862, 3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