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를 수 없는 나라』 개정판을 내며
1993년 발표 당시 작가에게“카뮈의『이방인』이후 최고의 처녀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되마고 상과 처녀작 상을 안겨주었던 『다다를 수 없는 나라(원제 Annam)』가 십여 년 만에 새로운 장정으로 독자들을 찾아간다. 프랑스 서점에서 우연히 김화영 교수의 눈에 띄어 단번에 그를 사로잡아 국내에 소개된 이후, 일반 독자뿐 아니라 국내의 많은 문인들을 매료해왔기에 이번 개정판 출간은 많은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으로 다가갈 것이다.
『압생트』와『시간의 지배자』『지옥 만세』등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프랑스 평단에 선풍을 일으킨 것은 물론이고 대중의 환호와 사랑을 받아온 크리스토프 바타유는 애초 소설가와는 동떨어진 길을 걸었다. 프랑스 최고 경영학 학교 HEC에 입학했던 그는 경영자 수련과정 중의 하나인 외국 트레이닝 코스로 베트남을 택했다. 지독한 더위와 끈적끈적한 습기, 무서우리만치 울창한 식물들, 이러한 베트남의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고독과 싸워야 했던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18세기에 베트남으로 떠났던 프랑스의 수사와 수녀 들의 이야기로 되살려냈다. 이렇게 탄생한『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죽음과 상실, 고독의 강 너머에 존재하는 존재의 본질과 사랑의 신비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극히 절제된 단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논리적, 인과적 접속사가 거의 생략되어 마치 각각의 문장들이 거대한 바다에 불쑥불쑥 솟아 있는 하나의 섬처럼 느껴진다. 고립된 섬과 섬 사이에는 망망대해와 건너지를 수 없는 침묵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독자는 그 심연을 따라,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함께 흐르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홀로 떨어진 문장들 사이로 가라앉아 침묵 속으로 침잠하여 거기에 자신의 적막한 존재를 비춰보고 있음을 어느 순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잊혀짐으로써 죽어간 이들과 잊음으로써 자유로워진 이들의 기나긴 여행
소설『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기나긴 여행 이야기이다.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 대혁명 전야의 궁정을 찾아온 베트남의 어린 황제 칸,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신을 가르쳐주기 위해 머나먼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프랑스의 수사와 수녀들……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듯 떠남과 다다름, 이별과 만남의 광경이 일견 건조한 듯 펼쳐진다. 이러한 소설의 출발은 미지의 베트남과 문명화된 프랑스를 지름으로 그려지는 원의 공간을 상정하고 있으며 작가는 신과 인간, 동양과 서양이라는 그 까마득한 거리감을 베르사유에서의 칸의 죽음과 문명화된 선교사들의 잊음과 잊혀짐, 그 망각의 여정을 통해 형상화해나간다.
소설의 양극점, 자연과 신을 향한 인물들의 항해는, 설사 아무리 높은 파도에 실려오른다 해도, 그 한계지어진 상승을 통해서는 결코 지상적 존재라는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애를 지닌 고독과 죽음의 행보로 이어진다. 신앙과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의연히 길을 나선 선교사들의 노정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수한 죽음과 고독, 침묵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항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혹은 신념과 회의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기에 죽음을 마주한 순간에야 그들은 비로소 닻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죽음과 반복되는 상실을 통해 작가 크리스토프 바타유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 증폭된 슬픔이나 비극성이 아니다. 이 소설 속 죽음들은, 구도의 행진을 방해하는 비본질적인 군더더기나 거추장스러운 표피가 떨어져나가고 지워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등 뒤에 남기고 끝내는 과거와 현재의 무게마저 떨어낸 뒤, 마침내 마주 선 세계는‘속이 빈 조가비’이다. 이것은 일종의 마음 비우기 여행, 즉 죽음으로 완성되는 절대적 망각의 여로인 것이다.
신심으로 가득 차 하느님을 향해 떠났던 도미니크와 카트린이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지고 그들 스스로도 자신을 잊은 순간,‘ 속이 빈 조가비’속에 남아 있던 것은‘오직 군더더기 없는 근원’이었다. 여행길에서 그들을 지탱해주던 신앙도 마치 거추장스러운 껍질인 양 벗겨지고, 여행이 끝나는 곳에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신마저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작가는 이‘군더더기 없는 근원’을‘벌거벗은’ 육체의 기쁨으로 형상화해 보여준다. 소설은 우리에게 이것이 신의 부정인지 아니면 또다른 어떤 종교적인 깨달음인지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자아의 한 모습,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나는 책을 사들고 기차에 오르는 즉시 문장은 짧고 여운은 긴 이 소설의 매혹에 빨려들고 말았다. 책을 다 읽고, 그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그리고 번역을 하고 마침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적요함, 거의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의 위력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_김화영(문학평론가)
문학적 감식안이 있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고 의심할 여지 없이 한 천재의 탄생을 예감하게 될 것이다. 이런 가슴 저리게 투명한 작품을 불과 스물한 살의 젊은이가 쓰다니. 아, 나는 정말 오래 살았다. _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
크리스토프 바타유는 냉정하고 건조하고 강건하다. 역사는 그에게 속았다. 그의 안남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를 따라 그의 안남으로 간다. 우리는 속기 위해, 녹기 위해 그를 따라 황황히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지나 안남으로 간다. _김영하(소설가)
“ 세계는 추악하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진정 유일한 이유이다.
작가는 현실과 싸우기보다,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세계를 변화시킨다 ”
크리스토프 바타유 Christophe Bataille
스물한 살에 발표한 첫 작품 『다다를 수 없는 나라』로 “카뮈의 『이방인』 이후 최고의 처녀작”이란 찬사를 받으며 처녀작 상과 되마고 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의 명문 경영학 학교인 HEC를 졸업했으나, 근원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4년 군복무중에 쓴 소설 『압생트』를 발표하여 보카시옹 상을 수상했고, 이후 『 시간의 지배자』『지옥 만세』『나는 바보들을 칭찬해주고 싶다』 등을 발표하며 프랑스 본격문학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로서 놀라운 상상력과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1995년부터 그라세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옮긴이 김화영
1942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알베르 카뮈론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고려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개성적인 글쓰기와 유려한 번역, 그리고 어느 유파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집필 활동으로 우리 문학계와 지성계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해왔다.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바람을 담는 집』『문학 상상력의 연구-알베르 카뮈의 문학 세계』『소설의 꽃과 뿌리-나의 시대의 소설가』『행복의 충격』『한국문학의 사생활』 등의 십여 권의 저서와, 알베르 카뮈 전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팔월의 일요일들』『사막』『짧은 글 긴 침묵』『내 생애의 아이들』『섬』『마담 보바리』『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등 팔십여 권의 번역서가 있다.
* 2006년 9월 30일 발행
* ISBN 89-546-0218-5 03860
* 128 * 188 | 184쪽 | 8,500원
* 담당편집 : 김지연, 김경미 (031-955-8860, 8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