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치열한 삶, 그래서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들이 생의 끝에서 남긴 한마디가, 바로 살아 있는 우리가 떠나야 할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우리가 그들의 말을 기억하는 한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머리말 중에서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삶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순리이듯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본다. 죽음의 오래된 교훈이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는 동서고금의 성인(聖人)에서부터 일반인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 남긴 말들에 대한 책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수놓은 그들의 말은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이 책은 그 감동어린 말들의 풍경 속으로 독자를 이끌고 들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엔딩 크레딧
책은 각각의 인물과 그들이 남긴 말의 성격에 따라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등 예술가들의 강렬한 마지막 메시지를 통해 그들의 치열했던 삶의 모습을 밀도 높게 그려낸다. 그들이 남긴 말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 표현이면서도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울림을 갖는다. 예술가들의 유언은 우리의 몰개성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통째로 뒤흔든다. 록의 신으로 추앙받았던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은 인기의 절정에서 대중을 비웃듯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자신의 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기억해주기 바란다. 서서히 소멸하는 것보다 한번에 불타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 유언은 그대로 시가 되어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시대와 인간 정신의 흐름을 꿰뚫은 디자인으로 패션의 혁명을 일으킨 코코 샤넬의 마지막 말은 의외롭게도 “나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해골을 남길 것 같아요”였다. 이 말은 새로운 미(美) 개념의 탄생을 알린 그녀의 신산스런 삶을 함축한다. 화려한 성공 뒤에 숨은 좌절과 불행, 남모르는 집념과 고뇌의 침전물 같은 유언인 셈이다. 그 밖에도 1만 7천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일기를 남긴 아미엘, 육체와 정신의 극심한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해낸 멕시코의 국보급 화가 프리다 칼로, 한국 최고의 서정시인 김소월 등의 남다른 생애를 그들의 마지막 말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2부는 사상가 및 정치가 들의 무게감 있는 전언들로 묶였다. 일찍이 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간’이라 일컬었던 혁명가 체 게바라, 대영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영국의 해전 영웅 넬슨 제독, 조선 성리학의 태두인 이황과 이이, 선비정신의 표상 매천 황현에 이르는 인물들이 망라되었다.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 체 게바라는 “나는 지금 혁명의 불멸성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으며, 넬슨 제독은 “신이여, 고맙습니다. 저는 소명을 다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았다. 정좌한 채 죽음을 맞이한 퇴계 이황이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였다.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미증유의 통찰이 담긴 그들의 마지막 말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레 경건과 겸손의 의미, 살아가는 일의 대의(大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3부는 영화배우, 종교인 그리고 일반인들이 남긴 일상적이면서도 감동적인 마지막 말들로 채워져 있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앞두고 있던 오드리 헵번은 자신이 애송하던 시로써 유언을 대신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천천히 말을 하세요……” 이 시는 세기의 요정으로 살던 그녀가 어느덧 헐벗은 영혼들의 친구로 살게 된 진솔한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무너진 탄광에서 마흔두 시간을 견디다가 끝끝내 죽어간 광부가 유서로 남긴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별로 고통스럽지 않단다. 그냥 천천히 잠이 드는 것 같아. 사랑한다. 모두에게 다음 세상에서 만나자고 전해주렴.” 영화 <슈퍼맨>의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아내 데이너 리브는 또 어떤가. 남편의 투병을 돕다 자신마저 병을 얻어 채 이 년도 안 돼 남편의 뒤를 따른 그녀의 마지막 말은 “결코 포기라는 단어를 몰랐던 한 남자와 결혼했고 행복했다”였다. 사람들은 저세상에서 남편을 다시 만날 그녀를 오히려 축복했다.
시련과 역경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낸 철인들,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몸소 일깨워주고 간 우리의 이웃들, 그들의 삶은 말 그대로 거룩하고도 장한 한 편의 영화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마지막 한마디만큼 아름다운 엔딩 크레딧은 이 세상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여, 용감히 너를 맞으리니 언제든지 오라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남긴 유서에서 베토벤은 청각장애로 인한 고통을 비롯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모멸감을 견딜 수 없어 외롭게 지낸다는 자신의 불우한 심경을 토로했다.
“내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너희와 어울려야 할 때에도 그냥 망설이기만 했던 것을 용서해다오. 나는 유형을 당하고 있는 사람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다. 그런 나를 만류한 것은 예술뿐이었다. 나에게 부과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언제 오든 기쁘게 맞으리라. 내가 가진 예술적 재능을 모두 발휘하기 전에는, 설령 운명이 나를 괴롭히더라도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죽음이여, 용감히 너를 맞으리니 언제든지 오라.”
베토벤의 음악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려는 불멸의 의지와 열정이 담겨 있다. 뮤즈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지상의 영혼을 뒤흔들고 이윽고 천상을 향하는 음악, 바로 인간의 음악이었다. ―본문 중에서
죽는 자리의 마지막 말이 시작하는 날의 말
돌이켜보면 내 운명 속에 뛰어든 한 권의 책이 있고, 한 사람도 있다. 그로 인해 내 인생이 크게 달라졌다는 걸 안다. 나는 이 책이 누군가의 운명에 뛰어들 책이라는 걸 직감한다. 그리고 이 책 속에 담긴 치열한 정신들이 누군가의 인생에 진지하게 개입하게 되리라는 것도.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누구보다도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청소년기에 이 책을 만나는 이들이 나는 한없이 부럽다.
안도현(시인)
이 책을 읽는 동안 잠시 여행을 한 것 같았다. 원재훈은 무궁화 다섯 개짜리 호텔방 같은 곳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아주 편안하고 안락하게 위대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책을 읽고 나자, 혼자서만 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절하고, 방황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그렇게 가까이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그들이 울음을 그치면 곁에 조용히 이 책을 놓아주고 싶다.
오미희(방송인)
가수 이태원은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이라고 노래했다. 우리는 솔개가 아니므로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을 터이다. 아아, 말을 하느니, 푸른 하늘에서 땅 위의 먹이를 향해 급강하하는 솔개가 되거나 캄차카 바다를 헤엄치는 물개가 되고 싶다.
원재훈이 모아놓은 ‘임종 자리의 말’들을 읽어보니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말을 해야만 죽어지는 모양이다. 원재훈의 글은 옛 고승대덕의 죽음에서부터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에 이르기까지 죽는 순간의 말들을 두루 챙겨서 장관을 이루었다. 그 마지막 말들은 대부분 죽음을 사절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데리고 죽음으로 건너갈 수는 없었고 말은 끝내 살아 있는 자들의 편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좀더 빛을” 또는 “초록색으로 해줘” 또는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한들 그 빛과 초록과 매화는 산 자들의 것이다. 죽음은 인문화될 수 없는 자연현상이고, 공유할 수 없는 사생활인 것이다.
그래서 말은 산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 마지막 말들이 살아가는 날들의 고난을 공정하게 해주고, 이제는 잃어버린 삶에 대한 경건성을 일깨운다. 죽는 자리의 마지막 말이 시작하는 날의 말이다.
김훈(자전거레이서, 소설가)
* 초판발행|2006년 8월 16일
* ISBN|89-546-0206-1 03810
* 153*210|304쪽|9,500원
* 책임편집|조연주, 오경철(031-955-8865, 3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