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기억, 언어, 그리고 에로티시즘……
현실로 걸어나온 천재의 새로운 변신
작품집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단편 「청수淸水」이다. 수록작 중 제일 먼저 씌어진 이 작품은 비슷한 시기에 발표했던 두번째 장편소설 『달』과 분위기와 문체가 많이 닮아 있다(또한 당시 계간 『문학동네』에 소개되어 국내 독자들에게 이미 친숙한 작품이기도 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태양빛, 커피를 마시고 외출 준비를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 그리고 유서 깊은 교토의 산책로를 거닐며 마주치는 불가사의한 일들…… 시간이라는 ‘제약 혹은 무한의 연속성’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기억의 집적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환상문학적인 분위기와 특유의 고풍스러운 문체로 풀어내는 그의 진술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현실을 뛰어넘어 그만의 독특한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카세가와」는 젊은 소설가와 여성패션지 편집자가 교토의 러브호텔에서 보내는 하룻밤을 그린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농밀한 성적 묘사가 전면에 드러나 있는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일식』과 『장송』의 작가가 정말 이런 소설을 썼나?”라는 놀라움과 함께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것은 동시대 일본 작가들에게서 곧잘 나타나는 도착적인 성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 속 두 남녀의 행위와 대화에는 이성에 대한 동경이 호감으로 바뀌고 이윽고 연애감정으로, 그리고 연민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녹아들어 있다. 또한 젊은 나이에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현실과 동떨어진 시대를 무대로 한 대작을 간행한 주인공(아마 히라노 본인을 모델로 삼았음에 분명한)이 자신에게 여성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의 변천과정에 대해 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한 감상을 풀어놓을 때는 과연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감탄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몇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섹스 장면의 묘사에서도 작가는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특유의 치밀하고 분석적인(?) 수사법을 착실하게 지키고 있다. 그로 인해 ‘적나라할지언정 야하지는 않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현대적인 히라노 게이치로 풍의 성애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로도 쭉 성이라는 주제에 일관된 관심을 보여온 그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피아노를 치는 쇼팽의 손놀림을 묘사할 때와 야한 장면을 묘사할 때 모두 같은 정열을 갖고 쓰고 있습니다. (웃음) 물론 쓰면서 스스로 마음에 드는 묘사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성적인 문제는 인간생활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남녀의 연애에서도 꽤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소설에서는 곧잘 ‘성은 연애가 아니다’라는 식의 태도가 나타나곤 하죠. 연인 사이의 밀고 당기는 심리를 아주 섬세하게 표현하다가도 섹스 장면만은 난잡하게 그려버리거나, 혹은 아예 생략해버리거나. 그런 건 이상하지 않나요?”
덧붙여 이 책의 제목 ‘센티멘털’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In a sentimental mood라는 재즈 명곡에서 따온 것으로, 한국어판 발매에 즈음하여 작가 본인이 직접 정해준 제목이다. 반복해서 흐르는 그 선율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논해지는 그의 재즈 취향도 작가에 해한 호기심과 소소한 재미를 채워주는 부분이다.
『일식』의 충격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지적 실험
이어지는 두 작품에서는 형식상의 실험이 두드러진다. 「추억」은 언뜻 보아 시어들을 낱낱이 해체해서 흩어놓은 듯 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모호해 보이는 토막난 말들 속에는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트릭이 숨어 있다. 시어 하나하나와 작품 전체를 동시에 바라보았을 때에만 알아차릴 수 있는,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는 당돌한 트릭이다. 물론 마지막 장의 시만 읽는다 하더라도 히라노 게이치로 특유의 고풍스러운 매력이 살아 있는 문체를 감상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또다른 작품 「얼음 덩어리」는 하나의 소설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페이지의 왼쪽에서는 불만스러운 현실 속에서 불륜관계를 지속하는 삼십대 여자의 이야기가, 오른쪽에서는 자신을 낳고 바로 죽어버린 친어머니의 환영을 좇는 중학생 소년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연히 어느 장소에서 마주친 그 둘은 서로를 각각 불륜 상대의 아들과 자신의 친어머니로 착각하게 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기묘한 마주침이 계속되는 가운데 둘은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더더욱 심증을 굳혀간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에서 두 사람이 대면하게 되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서로 교차, 교착하는 두 이야기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단순한 형식상의 병치가 아닌, 전혀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서로 다른 인간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불가사의함이 인간관계의 불확실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소설적 재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소설의 미래를 향해 내딛는 천재의 첫걸음
히라노 게이치로는 『일식』 『달』 『장송』 세 편의 장편을 자신의 제1기, 그리고 『센티멘털』을 시작으로 하는, 현대인의 정체성과 문명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일련의 단편들을 제2기라고 칭한다. ‘천재’라는 수식어에 이미 익숙해진 독자들은 그의 새로운 변신에 낯선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르나 그의 작가로서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 소설집은 초기 삼부작인 『일식』 『달』, 그리고 『장송』 이후 저의 집필활동의 방향성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렇다면 도대체 소설은 어떤 모습으로 가능한 것인가?’라는, 모든 현대작가에게 던져진 물음에 대한 제 최초의 대답이 될 터입니다. (……) 『일식』 이후의 독자분들께는 이전의 세 작품이 왜 씌어져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장송』이 19세기 정통소설의 정점을 딛고 미래를 내다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이 작품집은 그 실천의 소중한 첫발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 양윤옥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 번역으로 일본 고단샤(講談社)가 수여하는 ‘노마(野間) 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슬픈 季箱』 『그리운 여성 모습』 『글로 만나는 아이 세상』 등의 책을 썼으며, 『일식』 『달』 『장송』 『철도원』 『칼에 지다』 『장미 도둑』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납 장미』 『사랑을 주세요』 『첫날밤』 『플라나리아』 『연애중독』 『지금 만나러 갑니다』 『그때는 그에게 안부 전해줘』 등의 문학작품과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세상을 선물한 개』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06년 5월 2일 발행
* ISBN 89-546-0146-4 03830
* 128*188 | 264쪽 | 9,500원
* 담당편집 : 이상술, 양수현(031-955-8864, 8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