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상상력으로 노래한 사랑의 까마 수트라
우리 시대의 무당이기를 꿈꾸는 작가 한승원은 고향과 고향사람들의 숙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가 주력하고 잇는 사람들은 대개가 고향을 상실한 실향민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선량하지만 자기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고향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승원은 이러한 사람들의 몽매를 어루만지며 고향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모든 것이 변화하고 소멸해 가는 속에서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준다.
끝없는 욕망의 뻘에서 연꽃처럼 벙그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아름?움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노래한 "까마"역시 까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주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순정한 사랑의 방식을 고향상실의 문제와 겹쳐놓으면서 독특함을 한껏 밀어올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고향이란 단순히 지리적 영역으로서의 고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고향을 일컫는다.
소설의 주요인물인 송영선과 지이남의 수몰로 인한 고향상실, 그로 인한 가정파탄, 그리고 솟?가 선우용의 가장으로서의 뿌리뽑힘 역시 이 고향상실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히 쉴 수 있는 무형의 공간까지 고향의 범주로 넣을 때, 부권을 잃고 무기력에 빠진 선우용에게 쉽게 확인되는 것은 그가 정신적 실향의식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주인공들의 지리적·정신적 고향상실로부터 사랑이란 이름의 새로운 고향짓기를 통해, 우리 영혼의 안식처인 사랑의 큰 품을 보여준다.
우리 시대 참된 사랑의 의미찾기
"모든 겨울새는 악령(惡靈)"이라고 ODRKR하는 소설가 선우용, 그에게 어느날 겨울새 같은 여자 송영선이 날아든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심한 무력감에 빠져 있던 그는 이 겨울새를 품에 안으며 비로소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그러나 선우용은 이 겨울새 같은 여자의 먹이였다. 앳된 얼굴로 재수생 행세를 하며 매춘행위로 생계를 꾸려가는 송영선은 매가 먹이를 노리듯 선우용을 향해 날아든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그녀의 착지점은 당연히 선우용의 가슴속이 아니라 호주머니 속의 지폐일 뿐이다. 그녀는 몸바쳐 얻은 몇 닢 지폐로 남루한 삶의 추위를 RFLSEK.
하지만 그녀가 사는 이유는 반신불수인 어머니 봉양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첫사랑이었던 시인(詩人)지망생 지이남을 향한 순정한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지이남은 이미 병든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다. 그런 가운데 송영선은 지이남의 아이 하나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꿈과 가난한 그가 편히 시를 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싶다는 꿈을 키워간다.
이처럼 이 소설은 소설가 선우용, 겨울새 같은 여자 송영선, 시인 지망생 지이남 등 세 인물을 중심으로 엮어진다. 다시 그 중심은 송영선이라는 26살의, 맹꽁이 가방을 메고 다니는 가짜 재수생이다. 그를 축으로 이야기는 다채롭게 분광된다. 송영선의 선우용을 향한 사무적인 태도라든가, 송영선의 지이남을 향한 순정한 사랑, 그리고 선우용의 송영선을 향한 순수한 인간애가 유려하게 펼쳐진다.
송영선이 바퀴의 축이라면 지이남과 선우용은 바퀴살인 셈이다. 그 주변에 선우용 일가와 송영선 일가, 지이남의 형제들이 바퀴의 가장자리를 이루며 돌아가고 있다.
이 인물들의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와 욕망의 무절제한 번식은 고향상실이라는 깊은 상처를 고유하고 있다. 송영선과 지이남은 수몰로 인한 지리적인 고향상실감으로, 소설가 선우용은 가장으로서의 뿌리뽑힘에 의한 정신적인 고향상실감으로, 그들은 실 끊어진 연처럼 삶의 변방을 부유한다.
그래서 이들이 갈망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 속에서 상처를 치유받고 신생하고 한다. 이들에게 사랑이란 고향 다시 짓기의 행복한 노동에 다름 아니다. 시를 향해 순수한 열정을 불 태우는 지이남, 그런 지이남을 향한 송영선의 순정한 마음, 단순한 육욕의 차원을 넘어 인간애를 보여주는 선우용. 이들이 보여주는, 영원히 수몰되지 않고 고갈되지 않을 사랑이야말로 피폐한 현대인이 누려야 할 아늑한 희망의 거처임을 이소설은 조용히 웅변한다.
한편 소비지향적인 현대 사회의 폐단을 향한 작가의 선도 결코 곱지만은 않다.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으는, 선우용의 아내 최봉희, 물질적인 욕망에 눈먼 딸 선우지숙, 불륜을 일삼는 아들 선우동민, 사위 박종훈의 제 몫챙기기와 외도 등 헛된 욕망을 좇아, 서로를 불신하고 이간질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의 삶은 바로 물질적 풍요가 낳은 이 시대의 궁핍한 영혼의 초상이다.
고향상실, 사랑 속에 새로운 영혼의 고향짓기
"가장 참된 사랑을 위하여 이 소설을 씁니다. 세상에 사랑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제가 이때껏 낳을 수 있었던 사랑보다 좀더 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 소설은 작가 한승원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천착해온 고향의 문제를 풀어헤치면서, 모든 것이 변화하고 소멸해가는 속에서도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들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게 해준다. 고향상실과 그로 인한 생활의 타락, 욕망의 무한 증식, ?러나 작가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도 연꽃처럼 피어나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노력의 결실이다. 이를 두고 작가는 "이때껏 낳을 수 있었던 사랑보다 좀더 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소설 제목 까마는 "인도 신화 속의 사랑의 신(神)을 뜻하는 것"으로, "꽃으로 장식된 다섯 개의 꽃화살을 가지고 동?는 욕망을 사람의 가슴에 쏘는 신"을 일컫는다. 이는 다시 교과서 교본울 뜻하는 수트라와 결합하여 일반적으로 까마 수트라(사랑의 교본)로 쓰인다. 금욕으로 말미암아 건조해진 사람들의 삶을 습하고 차지게 한다는 까마 수트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바로 우리 시대의 참된 사랑의 의미찾기를 보여준다.
우리는 늘 길이와 무관하게 완독할 수 있게 하는 저력을 가진 소설을 고대한다. 지루함과 불쾌감만 유발하는 소설이 아니라 읽는 이의 시선을 결코 놓지 않는 소설, 글과 사람이 밀도 있는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소설을 독자는 원한다. 그러나 이런 소설은 아무때나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독자들에게 책읽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가운데 무딘 감성의 혈관에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