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있어 사십이라는 나이는
아주 중요한 전환기이다.
성적 매력이 사라지는 시기, 그것은
더이상 여자라는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비로서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여자에게 있어 사십 세의 생일이란 인간으로서
무언가를 시작해볼 수 있는
첫번째 생일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의미의 여자의 첫 생일은 언제인가.
"남편과 자식의 생일상은 차려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 생일상을 차릴 수 있는 중년의 여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사십세의 생일을 며칠 앞둔 한 미혼여성의
인생유전을 통해 이 시대의 여성문제를 파헤친 신예작가 이진선의 첫 장편소설
『여자의 첫 생일』이 출간되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현실을 새로운 패러다음으로
읽어내려는 작가의 치열한 자기모색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여자이기 때문에비극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땅의 여성들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해부한 여성소설이다.
남자의 여자에서 인간의 여자를
찾아가는 본격 페미니즘 소설!
한 출판사의 편집부장인 주인공 윤여민은
치마를 입으면서도 여성의 현실을 생각하며, 상업적인 출판물 하나에도 이 땅의
불길한 역사를 떠올리는 예민한 여성이다. 그녀의 직장인 가나출판사는 진보적인
민족문학진영의 작품이나 사회과학물 출판으로 한때 잘 나가던 출판사였다.
그러나 시대 상황의 급변과 맞물린 사회과학물의 퇴조로 갈수록 경영의 어려움에
처한다. 그래서 사장 이하 편집차장은 그 타계책의 일환으로 신세대를 겨냥한
대중물을 기획한다. 이른바 해적판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녀는 반대한다. 출판사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소 대중적인 기획물로 활로를 개척해보자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그녀는 고심
끝에 새 출발을 결심한다. 바로 40세의 생일날 아침이다.
이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짜여진다. 그러므로 현재 시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위와 같은 줄거리는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적인 구조일 뿐,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녀의 현재 처지와 40년의 과거사가 소설의 메시지를 향해 수렴되면서
이야기는 온전한 깊이를 갖추게 된다.
다분히 여성문제에 대한 화자의 내면의식
표출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사십세의 생일을 며칠
앞둔 날 아침부터 시작하여 생일날 아침을 맞이하기까지 5일 동안의 사건을
감싸안고 있지만 그것은 40년이라는 그녀의 짧지 않은 전 생애를 회상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 70년대의 암울했던 대학시절, 80년대의
사회생활 등 시대 상황과 맞물린 40여 년의 지난 시절은 여성에 대한 가정적,
사회적 억압으로 가득찬 불행한 시절이다. 그 억압의 풍경은 두 줄기로 진행된다.
지난 시절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과거의 불줄기와 직장인 출판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물줄기가 그것이다. 그들은 여자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토하며
남녀평등일는 이?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먼저 과거의 물줄기 속에는 아버지의
가공할 폭력과 이에 대한 어머니의 순응, 어린 그녀의 반발, 격동기의 대학
생활, 한 남자와의 연애 등이 흐르고 있고, 80년대의 군부독재 시절과 그후
사회의 급변으로 인한 전망 없는 시대 속의 삶, 남성문화에 대한 대인문화의
모색 등이 현재의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간다. 이렇게 진행되는 그녀의 인생여정은
여성 억압의 실상과 출구찾기의 지난한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한 가정 내에서의
여성억압으로부터 전 사회적으로 진행되는 억압구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조명하는
가운데 그녀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모순에 찬 허구인가 하는 점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보다 근원적인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린시절, 그녀는 한때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지만 집에서는 가혹한
폭력의 집행자인 아버지의 빈번한 어머니 확대를 목격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순응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녀는 마침내 그 까닭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평생 남의 수입에 의존해서 소비생활만 해왔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서는 생존을 유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처럼 경제력이 없는 여자의 무력함"은 참을 수가 없다며
"경제력을 갖춘 자립적 여성"이 될 것이라고 각오를 다진다.
가족내의 억압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여성들의 억압상 고발
유년기의 체험이 한 사람의 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면 이 소설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그녀가 겪은 유년기의
참담함은 앞으로의 파란많은 삶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80년대의 격동기에
대학을 다닌 그녀는 운동권 주변의 상황을 관찰하면서 이 사회에 퍼져 있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의 폐단을 절감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해서도 그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줄곧 남성들로부터 가해지는 굴욕과 멸시, 성적 폭력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에 복무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지배자의 위치를 고수하려는 첫 애인 문일규, 수배자의 소재를 확인하던
도중 갑작스레 "혹시 내연의 관계 아니야, 이거!"라고 내뱉는 형사들,
한평생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온 진보적 지식인 민중문학자 이선생의 근엄한
얼굴 뒤에 감추어진 파행적인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또 출판사에서의
사장이나 편집차장, 그리고 유명한 추리작가의 여성 관념 역시 보수적인 여성관을
아무런 반성없이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인 여성관이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그녀는
지적한다. 소위 사회변혁을 위해서 운동을 한다는 일분 운동권 여성들의 고루한
생각이 더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질 못했다. 그들 역시 남성중심의 사회체제를
무의식중에 내면화하고 있었다. 이런 언밸런스를 지켜보며 그녀는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세상이란 결국 여성에 대한 편견을 없애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며, 이러한
편견에 으한 남녀 차별은 여성에게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남성에게도 끊임없이 억압을 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싸우며 사는 남자의 길, 뒷바라지하며 사는 여자의 길.
이렇게 딱 나누어 정의되지 않는 제삼의 길(…)전통적인 고정관념, 남자와 여자를
이분법으로 가르지 않는 어떤 새 길"을 모색한다.
그 새 길에 대안문화라는 여성출판문화운동모임이
놓여 있다. 그녀가 모색하는 대안문화는 여성문화의 창출이다. 인류가 멸망의
벼랑길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이제까지의 역사가 남성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인류가 이 벼랑에서 평원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주변부로 처진
여성적 삶의 방식, 사고 등이 사회를 움직이는 운영원리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그녀는 결국 "혼자의 힘으로 홀로 서기를 완성해낼 수 없다. 사회전반적인
변화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며 여자들의 광범위한 연대의 필요성과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소설을 쓰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작각는 자신의 도전과 좌절의 삶을 "이
소설로 쓰기까지에도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며 "여자에게
있어 사십이라는 나이는 아주 중요한 전환기이다. 성적 매력이 사라지는 시기,
그것은 더 이상 여자라는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비로서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여자에게 있어 사십세의 생일이란 인간으로서
무언가를 시작해볼 수 있는 첫 번째 생일인지도 모른다"(「작가의 말」)고
말한다. 이 의미심장한 발언은 헐렁하고 부실한 논리에 몸을 실은 채, 그간
한국의 문학시장을 휘저어놓았던 유사 페미니즘 소설들과 다른 이 소설의 독특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먼저 주인공이 독신 여성으로 설정되었다는 점과 그
여자의 삶이 외롭지도 저속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는 점, 동등한 인격체의
결합이 아닌 기형적인 부부관계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여성문제 소설들과는
달리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는 여성억압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이 작가의 튼튼한 사회과학적
인식의 지반 위에 건설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이 소설은 "이제까지 씌어진
몇몇 여성문제를 다룬 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기존의 소설이 동등한 인격체의
결합이 아닌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는 기형적인 부부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여자의 첫 생일』은 가족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는
여성 억압의 모습들을 성공적으로"(문학평론가 류보선 / 해설 「총구에
핀 한 송이 카네이션을 위해」)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서
쉽게 감지할 수 있는, 현실의 전 영역을 감싸안으려는 진지한 성찰은 앞으로
작가의 행로에 각별한 주목을 요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이 작가를 얻음으로서
보다 깊이 있는 여성소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